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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도 추억이 될 수 있는가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그래서 전대미문의 화성연쇄살인사건 마지막 범행인 1990년 11월 15일을 기준으로 오늘(14일)이 지나면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다. 오늘 이후에 그 범인을 찾아 복수한다면 그것은 사적 폭력인 린치(lynch)로 오히려 처벌 대상이 된다. 정상참작은 되겠지만.
 

장태관 작가가 화실 송사로 인해 만화계를 떠나려고 했을 때 동료 작가의 다독거림으로 재기한 것은 만화 [미궁의 연쇄살인마]이다. 단행본으로 5권 완결된 이 만화의 연재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지만 그보다 제목에 대한 해프닝이 있었다. 애초 기획된 제목은 '화성연쇄살인마'였는데 화성분들이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 기획 때에도 그랬지만 화성과 연쇄 살인을 결부하는 그 어떠한 것도 반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이 화성 분들에게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이 그 범인을 쫒아 산야를 헤매고 공포에 떨었고 그 이전에 잔인하고도 무참한 죽음이 있었다. 그것을 사회가 법으로 합의한 공소시효로 이제 서류철은 문서보관함으로 들어가게 됐다.
 
 
공소시효를 연장하자는 여론과 그것이 안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인데 그 살아 있는 자들의 속내는 무참히 죽은 사람들의 생명을 한 번 더 살해하고 있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15년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15년이란 실제적 기간은 사건 당시의 증거가치가 그대로 유지되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흘러 버려 증거에 입각한 재판에 문제가 발생한다. 증인은 기억이 가물거리고 증거가 있다하더라도 훼손이 심해 채택될 자료도 변변치 못하게 된다. 다른 이유는 15년 간 범인이 도망다녔으니 그 심적 고통이 실제 처벌받는 것을 상쇄할 만큼 되는 기간이 15년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정도 도망다녔으면 이제는 정상적 사회 구성원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 봐라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이유가 100%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증거와 관련해서 뻔히 알고 있는 범인인데도 고문기술자처럼 배후가 빼돌려 주면서 그 기간을 채운다고 증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두번 째 이유도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입꼬리에 미소를 띠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 오리무중이라면 15년 동안 발뻗고 잠 잤을 것이니 고통의 상쇄라는 의미도 해당되지 않을 때가 있다. 후자의 이유는 기본적으로 범인이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존재에게 부여된 '양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양심의 무게는 차등이 있다. 어떤 이는 무심결에 과실치사로 아이를 차로 치어 죽였는데 그 죄책감에 자살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고의적으로 남편 눈알을 찌르고 불태워 죽여 보험금을 타내면서도 죄책감 없이 다른 대상을 쫒아 열심이 찔러 댔다.
 
화성의 그 범인은 고문기술자처럼 자신이 드러난 것도 아니며 죄책감에 고통받을 양심의 소유자라는 확증도 없다. 그에게 있어 공소시효란 어떤 의미일까? 난 여전히 그가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오늘 자정에 소주 한잔 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양심의 존재가 가벼워 보이는 범죄자(흔히 잔혹이나 연쇄살인이라 하지만)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것은 법의 자의적 주장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특정한 범죄에는 그 시효를 연장 또는 무기로 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것이다. 참고로 보도를 보니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에 있어서 미국은 공소시효가 없고 독일은 30년, 일본은 25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살아 있는 자들의 양심도 별반 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공소시효 연장에 우물쩡하는 입법추진 주체들의 속내이다. 지난 8월에 의원들 몇이 공소시효를 연장하자는 내용으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냈지만 이후 개정과정은 진행되지 못했다. 그 배경이 참으로 가볍다. 법이란 것이 화성 살인범만 공소시효를 연장하자고 할 수 없으므로 일반적 연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그러니 형사소송법의 공소시효만이 아니라 여타 법의 공소시효도 다 연장되어야 한다. 그게 법의 현실이다. 그런데 다른 분야의 공소시효 중에는 정치인들이 더 줄였으면 하는 시효들이 널려 있다. '정치자금법'과 '기부행위 금지', '뇌물 수수' 등에 5년의 공소시효가 있고 '부정선거'에도 3년의 시효가 있다. 이것이 이번 개정을 하게 되면 2년씩 늘어 난다. 한 번 걸리면 현재보다 2년을 더 정치에 얼굴 내밀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화성 사건을 타겟으로 개정안을 적용한다면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공소시효가 만료된 모든 사건 중에서 새로운 시효를 계산하여 재수사를 해야 한다. 과거의 모든 대상범죄를 소급적용할 지에 대한 논란도 간단치는 않다.
 
그러나 기본적인 법 개정의 간단치 않음을 배제하더라도 자신들과 연관이 있는 시효 연장의 껄끄러움으로 이 개정안 논의가 잠잠한 것이라면 참으로 살아있는 자들이 연쇄살인범을 방조하고 무참히 죽은 이들을 또 다시 죽이는 짓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2년의 시효 연장이 싫어서 50년 이상의 삶이 날아간 9명의 죽음을 나몰라라 하는 짓과 같다.
 
대법관 후보 청문회에서 '일정한 요건 하에서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는 발언이 한 가닥 희망으로 작용할 지는 미지수이다.
 
2005. 11. 14.
주 모씨.

by 쥬피터 | 2005/11/14 15:05 | 사적만담 | 트랙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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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starot가 얼어죽.. at 2005/11/14 21:04

제목 : 연쇄 살인범들에 관한 지극히 감정적인 잡상.
살인도 추억이 될 수 있는가 저번에 미디어 다음에서 화성 연쇄살인범의 공소시효 연장 서명운동을 하는 걸 보았다. 인터넷에서 왠만큼 열심히 서명운동 하지 않고선 별로 달라지지 않을 현실이란 걸 잘 알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 서명운동이 효과를 발휘했으면 하는 게 내 심정이다. (비록 서명은 하지 못했지만-_-;) 이런......more

Tracked from 산왕의 건전성추구위원회 at 2005/11/15 00:00

제목 : 살인의 추억..
어제는 몸을 간신히 추스려서 메가박스 일본영화제 상영작 중 하나인 2003년작 '방심은 금물(방심무용)' 을 보러 갔습니다. 사실, 그 뒤의 심포지움2를 보기 위해 예약한 것으로 사전정보 없이 간 것이었습니다만, 아주 재미있고 유쾌하고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감상은 다음에 적어 보기로 하고.. 방심은 금물의 주연배우이자(야쿠쇼 코지와 공동주연) 자신이 감독한 영화 '하늘이 이렇게 푸를 리 없......more

Commented by nabiko at 2005/11/14 15:26
정말이지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은...분노 그 자체입니다.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1/14 16:52
나비코 님/국해의원들이 그렇게들 하죠. 정치란 국민이 정치 이야기를 안할 때 가장 잘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기준에 본다면 우리는 참 난감한 상황이죠. 분노는 혈압의 적입니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나날이 되시길^^
Commented by Astarot at 2005/11/14 19:57
처음 뵙겠습니다. 들락날락한지는 꽤 됐는데 리플은 처음이군요^^
접때 다음에서 화성연쇄살인범의 공소시효를 늘리자는 서명운동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생각이 나는군요. 아무튼 저 국회의원들 하는 짓 보니..저런 걸 보고 '두 번 죽인다'라고 하나요-_-;;어쩌면 저렇게 이기적인지 원...
그리고 트랙백 해가겠습니다.
Commented by 빨간밀짚모자 at 2005/11/14 22:06
공소시효를 늘려야 하는 이유와 늘리지 않을려고하는 뒤가 구리신 분들 이야기는 잘 알겠습니다만, 시효가 연장되더라도 소급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열받는 결과가 나오긴해도 헌법의 원칙이라는것은 그럴때마다 깨진다면 그건 더 이상 원칙이 아니니까요.
Commented by 아라가야 at 2005/11/14 22:33
경제적인 이유도 한몫하죠. 지금도 일인당 떨어지는 업무 분량이 너무 많아서 난리인데 늘어나는 공소시효에 따라 늘어나는 부분과 다시 재수사해야 되는 사건에 대한 부분, 엄청나겠죠.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1/14 23:15
Astarot 님/삶과 죽음의 경계는 워낙 뚜렷해서 소설 속 장면과는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에서는 전투 중 옆 전우가 총 맞으면 '우아악~ 다 죽여 버리겠다!'라면서 참호 밖으로 돌진한다지만 실제는 좀 다르다고 하더군요.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아~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라는 안도감이라고 하더군요. 그 뒤에 분노 또는 흥분의 광기가 나올 수도 있겠죠. 의원 뭉개기의 배경은 죽은 자의 무참함보다 산자의 부귀영화를 더 중시한다는 얄팍함이겠지요.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1/14 23:20
빨간밀짚모자 님/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개정안이라고 해도 그것이 법적으로 꼭 개정되는 것이 적절한가는 별개의 문제일 때가 많겠죠. 일사부재리나 소급불인정, 3심제, 사형제도, 사면제도, 증거제일주의... 등의 개념은 각자 그 논거가 충분히 있는 것이니까요. 그 중의 하나가 이번 개정안의 소급적용 문제겠지요. 그렇다고 연쇄살인범에게만 소급적용하여 공소시효를 없앤다고 해도 문제는 발생하지요. 교통사고로 순차적으로 두 사람을 죽인 과실치사범도 연쇄살인이냐 아니냐 따질테구요. 감정을 몇 줄 문장의 법으로 명시한다는 것이 오죽 어렵겠습니까? 그럼에도 뭉개기보다는 국민 감정을 최대한 포함할 수 있는 법안을 위해 고민이라도 해야 올바른 자세일텐데 그게 아쉬운 것이죠.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1/14 23:25
아라가야 님/결국 돈도 문제죠. 장갑차 압사 사건 때 국민 감정은 '양키 고 홈'이었죠. 그 때 한국이 돈으로 무기를 왕창 살 만하고 경제적으로 꿀리지 않는 나라였다면 그리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아시아안보담당장관도 아닌 차관급이 와서 공항에 내리자 마자 '미군 뺄까?'라고 코멘트하면 물거품이 되는 이유가 그 넘의 돈과 힘이 없어서잖습니까? 골목길 헤게모니나 국제 관계의 헤게모니 장악은 별 다르지 않다는 거죠. 그거 얻자고 유럽이 지들끼리 '우리가 남이가'라고 목청을 돋우는 것이죠.
얘기가 샜는데요, 암튼 소급하거나 개정이 되면 인력과 자금이 더 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죠. 다른 뭉개기 배경에 더하여 부가 비용을 감수할 만한 정치적 합의가 있을 때 개정이 될테구요.
Commented by spacenote at 2005/11/15 12:19
음. 저만 보기에는 아까운 글 같아요. 일간지에 내서 모두가 한 번씩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다들 사람같이만 살아도 좋을 텐데.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1/16 00:32
스페이스 님/아까우시면 제가 한 번 더 보면 되지요 뭐^^;; 농담입니다.
'사람 같이'란 말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겠지요. '사람답다'처럼 '너답다'라거나 '군인답다'라는 말에는 사전처럼 똑 부러진 정의는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사람 같이'를 '사람답게'로 말해도 같은 표현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가 인간이냐?'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행위에 대해서는 '사람'과 격리(죽이든 가두든)하자는 것이 법이잖아요?
물론 '개과천선'이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겠지요. 그런데 15년이란 기간이 지나도 이 말을 '천도 복숭아 먹어서 신선이 된 개'인 줄 아는 인간도 있을 거란 말이죠. 이런 '사람 같지 않은 것'에는 사람이 정한 15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쌍팔년도 버전으로)"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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