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스 | 로그인  


미국, 왕따 당하다.

덩치 큰 녀석이 동네 마다 꼭 한 명씩 있다. 이 녀석이 덩치도 큰데 마음씨마저 고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대부분 덩치 큰 녀석이 꼬마 세계에서는 대장이다. 뭐든 지 꼴리는 대로 한다. 오죽하면 덩치 큰 녀석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소설까지 지었을까?

간만에, 덩치 큰 녀석이 철저히 뭉개진 사건이 있어 적어 본다.
재미 없는 내용이라 슬쩍 접어 둔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그 부작용도 생겼는데 그것은 미국의 독주이다. 세계 경찰 국가를 자처하고 캐나다와 둘이 하는 스포츠를 '월드 시리즈'라고 부르는 나라, 미국 대통령은 비행기 테러범도 혼자 때려잡는 나라, 그러면서 모든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여기는 나라, 미국은 자국의 이익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덩치가 제일 큰 골목대장의 여건을 만끽하는 미국이다. 영어가 출세의 도구가 되고 미국의 아시아담당차관보가 한국에 오면 나라가 난리인 것은 결국 한국의 덩치가 미국의 덩치에 비해 세발의 피이기 때문이다. 체력은 국력이라지만 이건 차이가 나도 한참이다.

60-70년대야 공교육을 통해서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고 혈맹이고 구세주의 나라였지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그냥 힘이 쎈 나라라서 눈치를 봐야하는 외국일 뿐이지 '아이고 미국님' 분위기는 흘러간 노랫말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그 놈의 덩치가 어디 가냐는 것이다.

미국의 독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자만 그 대상은 석유나 공산품 파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국의 문화상품을 세계에 팔기 위한 것에 더 치우쳐 있다. 3년 전 미국이 자국의 문화상품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600조 원이다. 얼마인지 세어보질 않아서 감이 잘 안온다. 이 중에서 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300조 원이다. 여기에 한국도 열심히 팔아준 셈이다. 가진 놈이 더 하다더니 미국이 딱 그 짝이다. 더 팔자고 난리를 부린 것이 오래됐다. 힘 센 놈이 골목을 턱하니 막고 딱지 사 가라고 하는데 안 사면 팰 거 같으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그 놈의 딱지를 산다. 미국이 그러고 있다. 통상 압력이라는 외교적 수사로 표현되지만 자국의 문화상품을 팔아 주지 않으면 힘으로 팬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155명이 어울려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덩치 큰 놈이 계속 지 딱지를 사라고 하자 나머지 148명이 떼거리로 의지하며 반기를 들었다. 자기 딱지도 팔 수 있게 그만 패라고 딴지를 단체로 건 것이다. 그것이 문화다양성 협약의 통과이다. 어제, 그러니까 20일(수) 유네스코 총회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이 찬성 148, 반대 2, 기권 4의 압도적 결과로 통과됐다. 그러니까 세상의 딱지 종류가 다양한데 덩치 큰 놈 딱지만 사고 팔면 그게 무슨 재미냐며 다른 딱지도 팔 수 있게 룰을 정하자는 약속이 동네 마당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문화란 한 나라의 울타리 안에서 발생하여 발전한 고유의 자산이며 이것은 획일적으로 공산품화 되어서는 안되는 대상이다. 통상 압력을 무기로 한 덩치 큰 녀석의 폭력에 휘둘려 하나의 딱지만 돌아다니는 것은 히틀러가 생각한 인종 청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버팔로가 멋있다고 한우를 비롯한 각 나라의 소들을 도살하여 버팔로만 잡아 먹자는 것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협약의 통과가 국제법으로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협약을 비준하여 자국에 적용하는 나라가 30개 국이 넘어야 한다. 이렇게 국제법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면 문화에 있어서는 덩치 큰 녀석이 인상을 쓰면서 딱지를 팔아도 안 살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그 때에도 덩치 큰 녀석의 보이지 않는 발길질이 전혀 없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합법적인 발길질은 아니게 되므로 동네 전체에 호소하여 딴지를 걸 수는 있게 된다.

이 협약 통과로 인해 영화계의 '스크린 쿼터' 제도는 미국의 통상 압력과 한국 정부의 헷갈림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스크린 쿼터제는 미국의 통상압력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성공 사례로 국제 사회에서 주목되고 있었다. 물론 정부는 선거 공약으로 약속한 스크린 쿼터 사수로 인해서 덩치 큰 녀석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다. 명분보다 주먹이 가까운 것이라 한국 정부의 스크린 쿼터 축소 또는 폐지 운운은 끊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소심함의 증거는 이번 협약 통과 과정에도 드러난다. 한국 정부는 압도적인 표결 결과를 두고 '만장일치가 아니었고 협약 내용이 참가국(미국을 의미) 전체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잖느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찬성 표를 던지고서도 덩치 큰 녀석의 째려보는 시선에 움찔하여 대신 나가서 떠들어 준 셈이다.

앞으로 문화다양성 협약으로 각 나라의 각 문화 분야는 자국의 문화상품으로 일정 부분 채우고 보호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현재 논의되고 있는 출판쿼터제가 이 문화다양성 협약의 통과로 인하여 자동 가능해졌다는 인식은 넌센스다. 덩치 큰 놈이 어떻게든 계속 발길질을 몰래 해 댈 것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현재 통과된 협약의 법적 해석이 구구하기 때문이다. 통과된 협약의 쟁점은 제 20조 내용이다. 20조 1. (b)항의 내용은 '당사국은 이미 가입한 기타 협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혹은 기타 국제협정에 가입할 때, 본 협약의 관련 조항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내용은 '본 협약을 고려한다'는 것으로 협약이 우선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도 이 조항을 두고 '이번 협약이 기존의 국제 협약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을 하는 나라가 있다. 그게 한국 정부다.

154명이 우글거리는 마당에서 덩치 큰 놈(미국)의 딱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 투표를 했는데 한 놈(이스라엘)은 바짝 붙어서 덩치 큰 놈의 뒤에 섰고 네 명은 우물쩡 거리고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한국은 계속 덩치 큰 녀석 뒤에 붙어 있다가 원성을 어쩌지 못해서 막판엔 반대편에 섰다. 그러다가 '반대했지만 덩치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상큼한 멘트를 덩치가 듣게끔 날려준 꼴이다. 불쌍하고 가련타.

출판쿼터제는 일본만화에 대한 규제여서 출판이라는 범주로 접근하기에는 그 대상이 너무 제한적이다. 또한 번역도서의 제한이라는 규제는 외국 중 일본에 대한 접근이어서 또한 제한적이다. 문화다양성 협약의 통과 이후 비준을 30개국이 하리라는 예상은 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출판 쿼터제는 현재의 접근 방식으로 실현 가능성을 담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좀 더 현실적인 수단들이 쿼터제 도입에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슈로 그칠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한 3사의 대응(노 코멘트 조건이라서 밝힐 수 없다)을 보니 그것도 참 웃기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쿼터제가 지향하는 바는 한국문화, 즉 우리 만화의 보호와 경쟁력 확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쿼터제의 문제점 나열이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쿼터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지혜들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 중 하나가 한국만화 창작 환경의 개선이다. 그저 돈 달라는 것이 아니라 줄 거면 효율적으로 지원하거나 돈이 아닌 다른 개선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간만에 덩치 큰 녀석이 몰매를 맞는 모습에서, '권불십년'과 '화무십일홍'을 연상하는 것은 무리일까? 하지만 오만과 독선이 영원할 수 없다는 진리는 재확인할 수 있다.

2005. 10. 21.
골목길의 주 모씨.

by 쥬피터 | 2005/10/21 23:27 | 중얼중얼 잡설 | 트랙백 | 덧글(10)

트랙백 주소 : http://jumosee.egloos.com/tb/77695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오거 at 2005/10/21 23:46
잘 읽었습니다. 덩치가 밉살스럽긴 해도 옛날에 피로 의형제도 맺었고 걔네동네 쓰는 돈도 많이 갖고 있으니 맞다고 한마디정도는 해줘야 되겠죠(^^;;;)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0/21 23:59
오거 님/앞으로 우리 나라가 몇 번째로 비준하느냐를 보면 그 눈치보기의 강도를 알 수 있겠죠--;;
이거 협약 통과 이전에 덩치 큰 녀석이 '협약 문장에 문제가 있다'고 스물 댓 가지 조항을 '하나씩 나누어 투표하자'고 했지요. 물론 지연 전술이어서 모든 꼬마들이 떼거리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는데 우리 꼬마는 당당히 '덩치의 말대로 투표하자'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주먹을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꼬마인 셈이죠. 흠.
Commented at 2005/10/22 00:1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0/22 01:36
야와라 님/그 글이 올라 왔을 때 보긴 했는데 펙트는 엉망이지만 결론이 맞는 부분도 있어 별다른 코멘트 해 줄 생각이 안들었었다네. 뭐 딱히 답변해 줄 필요가 있을까? 답변한다면 세 줄 요약으로 될 것도 아니고.... 끙야.
Commented by 별밤 at 2005/10/22 02:46
어이쿠 상큼하기도 해라... 아무리 힘이 약하다곤 해도 말할 땐 말해야 하는 건데... 직접적으로 압박 당하는 입장이 아니라곤 해도, 입맛이 쓰군요. 하지만 문화다양성 보호를 위한 쪼매난 아이들의 연대에 덩치가 당했다는 것이 내심 꼬소합니다.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0/22 03:06
별밤 님/148명 중에 저 상큼한 짓을 한 아이가 10명 만 됐어도 덜했겠지요. 혼자 유난 떨었으니 상큼하단 것이죠--;; 어쩌면 덩치 큰 녀석에게 제일 만만하고 제일 많이 맞았던 똘마니라서 그랬는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쿨럭.
Commented by 화실인 at 2005/10/23 01:12
한미 관계에 대해선 무지하게 할말은 많지만 시사나 정치,국제 전문 블로그가 아닌관계로 간단하게만 글남김니다. 대한독립만세~~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0/23 12:46
화실인 님/여기에서 가능하면 정치 이야기를 담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이 가끔 문화 쪽에 연계되는 상황일 때는 슬쩍 꺼내 보기도 하지요. 그나저나 간단한 외침 하나로 확실하게 요약하셨네요? 하하~ 키워드는 대한독립만쉐이~
Commented by capcold at 2005/10/26 06:19
!@#... 참고로, 위의 국제협약은 찬성을 하지 않은 국가에게는 전혀 효력이 없습니다. 다만 '국제적인 쪽팔림'을 받을 뿐이죠. 하지만 언제 미국이 그런 것 신경썼습니까;;; 선언 자체는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한미 관계에서 상황은 거의 변할 것이 없습니다. '싸움'은 아직 초입일 뿐입니다.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0/26 15:36
캡콜드 님/비준이라는 또 하나의 단계가 있으니 이번 협약 통과가 상징적일 수도 있지요. 그래서 각 나라들이 몸짱에게 대들며 압도적으로 통과시켰지만... 문제는 비준국 30개국이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데, 우리나라가 비준국 1등을 기록하여 미국의 총애를 받을지, 눈치보기에 방점을 찍어 딱 중간인 15등을 기록할 지, 아니면 자존심을 세우려고 30등을 기록할지 앞으로의 행보가 자못 궁금합니다. 이러한 결정에서 주체적이지 못하는 국제 관계는 참 '현실'의 막강 파워를 새삼 느끼게 합니다.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