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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끽 #7] 죽일까 살릴까

죽일까 살릴까?
-그리기 힘들고 오래 걸리는 장면(또는 인물)


수염 찍기가 귀찮아서 '좌천'이라는 스토리로 도중 하차했다는 전설의 주인공 마 부장.

저 턱의 자국을 보라. 시간 보통 잡아 먹겠는가?
이 같은 장면, 인물의 비애(관련 뉴스 참조)를 다뤄 봤다.






아이큐 점프 2005년 34호 '만끽'
주 모씨.

죽일까 살릴까?

만화를 빨리 보는 독자를 가리켜 ‘엄지독자’라 한다. 책을 한 손에 반쯤 말아 쥐고서 엄지손가락만 살짝 움직여 종이를 넘기며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다가 레벨 업이 되면 만화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다보면 영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를 빨리 본다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 만화 보기는 쉬워도 그리기는 어렵고 빨리 볼 수는 있지만 그만큼 재미를 놓치기 쉽다. 이 간격에서 작가가 그리기 힘들고 오래 걸리는 장면으로 느끼는 고민을 찾아본다.

잘라버리고 싶은 머리카락
예전에 가장 그리기 쉬운 만화 주인공에 대한 투표가 있었다.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주인공은 ‘졸라맨’이었다. 직접 그려보니 정말 동그라미와 선 몇 개로 그릴 수 있다.(그림 직접 그린 졸라맨) 2위부터 고만고만하게 뽑힌 캐릭터는 ‘피카츄’와 ‘호빵맨’, 그리고 ‘짱구’도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그리기 쉬운 이유는 이목구비와 신체구조가 단순하고 머리카락도 별로 없어서 먹칠할 부분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검은 장발들은 이야기에서는 필요하지만 그릴 때에는 빡빡머리보다 귀여움 받기는 틀렸다. 특히 원고에서 'X'로 표시된 부분을 먹칠하는 담당은 이런 고역이 없다. [괴짜가족]의 ‘진’과 [위킷]의 단장(그림 두 장)을 보라. 헤어스타일 차이로 인한 허 단장의 머리 먹칠만 해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얼마 전 신문사 기자가 1일 문하생 과정을 경험하면서 ‘캐릭터들을 이발소에 데려가 머리를 밀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힌 것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가끔은 모자를 쓰고 나오는 주인공도 있지만 긴 머리 인물이 필요하니까 빡빡 머리만 등장시킬 수도 없다.

영화에서는 머리가 휘날려야 해.
지금은 제작기술의 발달로 만화영화에서 머리카락이 하나씩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머리카락의 움직임은 덩어리로 나타나곤 했다. 그러니 만화 주인공 중에 아예 딱 달라붙은 머리스타일이 만화영화로 진출하기에 편했다.
만화와 만화영화로 제작된 [아마게돈]은 오혜성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특징은 독특한 까치머리(그림 까치머리)인데 이것을 이현세 작가는 붓으로 찍는 방식으로 그렸다. 이 만화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 때, 동화(움직이는 연결그림)로 머리키락의 움직임이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까치머리는 특징 없는 장발(그림 장발 오혜성)로 바뀌고 영화에서는 심지어 금발로 표현되기까지 했다.

밀려난 인물
실제로 그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해서 등장인물을 바꾸는 작가는 없다. 우스개 소리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싶거나 얼굴의 주름을 펴거나 수염을 뽑아 버리고 싶을 때는 있다. 특히 원고마감이 늦어져 시간이 빠듯할 때는 화실에서 농담 삼아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만화에서 도중에 퇴장당한 비운의 인물을 찾아 봤다. [용하다 용해]의 강주배 작가는 이렇게 썼다. “마부장이 쫓겨나게 된 것은 언제나 그의 입가에 자리 잡고 있는 무수한 수염자국을 일일이 찍기 힘들어서라는 루머가 있긴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소문의 주인공인 마 부장은 전근 명령을 받아 만화에서 사라졌다.(그림 전근 명령을 받은 마 부장) 또한 원래 주인공인 무 대리 얼굴에는 눈썹이 안 보이는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특징(그림 마 부장의 천적 무 대리)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교통사고를 위장하여 회사를 며칠 쉬려는 무 대리가 눈썹을 밀고 우기는 장면이 있다. 그러니 눈썹을 원래 그려 넣지 않았던 캐릭터에 사용할 수 없는 소재가 된 상황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국 만화에서 무 대리는 자신의 앞머리를 들어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그림 눈썹을 민 무 대리)

한편 TV에서 많이 봤던 [톰과 제리]처럼 두 주인공 외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예 다리만 그리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이 고양이와 쥐 이야기이므로 사람을 꼭 등장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 부분에서는 그림에 들어갈 고민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다. 사람의 얼굴을 등장시키려면 캐릭터를 창조해야 하고 매 장면마다 얼굴을 그려야 한다. 그보다는 이야기 전개상 무리가 없는 하반신과 목소리만 등장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대충한 듯 대단한 그림
[순정만화]를 그린 강도영 작가는 고 고우영 선생님을 존경했다. 보통 다른 만화가의 작품에서 큰 붓으로 몇 번 원을 그리고 ‘혼란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한 칸을 날로 먹은 것’이라 했다. 그러나 고 선생님의 그림은 ‘그것과 달리 최고의 실력으로 그린 것’이라 평했다. 여기 손자병법을 쓴 손무의 손자 손빈의 모습(그림 손빈)이 있다. 검정 매직펜으로 죽죽 그은 듯 손빈의 머리를 그렸지만 다른 이가 그랬다면 아마도 달리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 작가의 작품에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간단한 묘사로 빛을 발한다.

머리카락이 전부는 아니다.
주인공의 외모가 아니라 이야기에 필요한 인물과 장면이라면 그것을 적절히 연출하고 그려야 한다. 고증에 철저한 허영만 작가의 경우 문하생이 밤새워 그린 2쪽 전면의 비행기 장면을 다시 그리라고 했다. 작품 배경에 의하면 등장할 수 없는 기종의 비행기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성격 상 실제 등장 가능한 비행기의 종류를 그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음 두 장면(그림 2개), 작품 [에덴](정철 작)을 보자. 두 그림 모두 한 페이지이지만 사람들이 모인 장면과 감옥 속 한 사람의 그림은 실제 창작의 시간에 많은 차이가 있다. 당연히 집단의 얼굴을 그리기가 어렵고 힘들다. 그럼에도 작품의 중요한 변화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시선을 꼭 그려야 하는 장면이므로 몇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얼굴을 그렸다.

속도의 조절
만화를 읽을 때 그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독자이다. 영화처럼 주어진 상영시간 동안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만화를 10분에 볼 수도 있고 1시간에 볼 수도 있다. 또한 모든 만화를 1시간 동안 꼼꼼히 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차분히 봐야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작가가 의도한 것들을 공감할 수 있으며 덤으로 작가가 등장인물을 두고 죽일까 살릴까 고민한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다. 만화가 재미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기왕이면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만화에서 찾으려면 천천히 만화책장을 넘겨야 할 때도 있다. (쫑)


2005. 10. 20.
주 모씨.

by 쥬피터 | 2005/10/20 01:23 | 칼럼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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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별밤 at 2005/10/21 01:36
다른 이야기지만, 인터넷 텍스트와 만화책 사이의 유사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만화책이 '일단 페이지 마구 넘기기'라면 인터넷 텍스트는 '일단 스크롤 마구 내리기'.
혹자는 이를 보면서 인터넷 매체는 만화처럼(이 말이 꼭 나오리라는 불길한 예감;) 소화량이 짧고 저급하다 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읽는 사람들의 소양이 그 수준에서 그 수준이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사실 많은 글에 대해서는 스크롤 내리기를 합니다만;
Commented by 쥬피터 at 2005/10/21 01:57
별밤 님/만화와 인터넷 텍스트의 문제라기 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정독의 버거움'이라고 보이기도 합니다. 뭐든 밑줄 쳐 가면서 읽지 않는 것이 대세라거나 흐름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장문의 버거움'도 있겠지요. '세줄 요약의 시대'에서 더 도드라진 특징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평이함을 저급합으로 동일시하는 시각들은 참 웃기긴 하지요. 어려우면 고급이고 어려워야 수용자가 폼나는 그런 것이라면 평수 넓은 집에 살아야 고매한 인격이라는 발상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성현들은 이런 것을 두고 '가벼움'이라고 질책했었지요.
본문에도 있지만 전체를 싸잡아서 빨리 보지 말거나 빨리 내리지 말라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리 볼 것도 있겠죠. 다만 전체 만화를 지칭하여 빨리 볼 매체라거나 그래서 저급하다거나 하는 주장은 그르다는 지적이지요. 저도 어떤 글은 한 문단에서 한 두 단어만 보면서 축지법으로 마구 건너 뛰기도 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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