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09일
가장 잔인한 인간, 자연의 최소 보복
지렁이에게는 있고 만물의 영장에는 없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소한의 보복이 아닐까?
일부 추가된 이미지는 잔혹할 수도 있으니 아래를 누르실 때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잔인한 인간, 자연의 최소 보복
‘기생수’란 만화는 지구의 생물체 중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만화를 비롯한 이야기들에서는 지구와 인류를 파괴하는 주체적 생명체가 인간으로 흔히 설정된다. 그만큼 인간은 위험한 동물이다.
‘기생’이라는 표현도 일반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이용하여 생존하는 것인데 인간에게는 부족한 듯 하다. 인간은 단순히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 이용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인간,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고 이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누리는 기본적 권리인양 수용한다.
그나마 문명이란 것이 등장하기 전에는 인간도 자연 중 일부로서 삶을 살아가는 생명이라 볼 수 있다. 문명이란 것이 태동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생명체 중에서 자신의 영역 표시를 담으로 하는 것은 인간 뿐이다. 동물들은 몸을 비벼 체취를 남기거나 발톱으로 긁은 표시를 한다.
생명체 중에서 자신의 이동을 위해 도로를 개설하는 것은 인간 뿐이다. 수중의 생명체는 그저 물길을 헤엄쳐 다니고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거나 초원을 뛰어다닐 뿐이다.
생명체 중에서 다른 생명체를 죽여 추위를 이기는 것도 인간 뿐이다. 심지어는 다른 생명체의 껍질을 벗겨 자기의 몸에 두르는 것이 인간이다.
생명체 중에서 다른 생명체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부위만 빼먹는 것도 인간 뿐이다. 특정 부위에는 사향노루의 배꼽, 상어의 어금니, 악어의 껍질, 물개의 거시기, 곰의 쓸개, 호랑이의 껍질과 뼈, 고래의 기름, 원숭이의 골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문제는 이 특정부위의 확보란 것이 대상 생명체에게는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인간의 위험성은 자만과 근시안, 잔인함으로 확대되고 있다. 인간은 당연히 다른 생명체를 어찌해도 된다는 자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백수지왕으로 군림해도 자연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리라는 근시안, 생명 연장이 아니라 유희로 다른 생명체의 생사여탈권을 만끽하는 잔인함은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둔 밤, 골목길에서 조우하게 되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은 이 같은 인간의 잔인함이 같은 종 내부에서도 적용된 결과이다. 성선설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이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물론 ‘인간이 가장 잔인해 지는 시간인 8시’(?)와는 무관하다.
같은 종에게 가장 잔인할 때는 물론 전쟁이다. 사람은 어떠한 방식이든 경계가 지어지면 한 없이 잔인해 진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정점이 물론 전쟁이다. 전쟁의 참혹함, 그 결과 중 몇 컷은 아래에 올린다. 심장 약한 분은 글만 읽고 나가시길 권합니다.
지난 8일,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3만 명이 넘는 인간이 사망했으리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 같은 자연 재해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도 자연 재해에 속수 무책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지렁이부터 새들까지, 인간이 흔히 미물이라 부르는 생명체들에게 부여된 지진 예지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알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으며 동물들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름대로 대피하는 행태를 보인다. 새들도 다른 곳으로 집단 이동한다. 이 능력에서 제외된 인간은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과학 문명으로 탐사기구를 땅이나 해저에 설치하지만 지렁이의 꿈틀거림처럼 체득된 능력이 아니다. 지렁이나 그렇게 머리 나쁘다는 새들에게도 있는 자연 재해의 예지 능력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없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이 인간에게 대응한 최소한의 보복이 아닐까?
2005. 10. 9.
개인 전시회보다 네팔로 쓰레기 수거하러 간 허 작가를 생각하는 주 모씨.
잔인한 인간, 그 현장들.
(임신부나 노약자, 임신 예정자(?)도 자제 바랍니다.)
아래 사진들은 원 출처 표시가 없이 인터넷 검색으로 떠돌아 다니는 이미지들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의견이 다르면 때론 자신의 생명도 무참히 죽입니다. 자살하는 생명체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인간은 자신에게도 잔인해 질 수 있나봅니다.
분신은, 인간 '무리'가 하나의 인간을 죽게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달려온 경찰 두 명 외에 배경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걷고 있거나 서 있습니다. 분신 장면을 보면 방금 시작된 불길도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된 뒤입니다. 그럼에도 저런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내 편이 아니거나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태도이겠죠. 이런 상황에서 같은 종이라는 기본적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것이 더 참혹하다는 것이죠.
지구촌에서 한 국가 안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국민이면서 내 편이 아니라 네 편이라는 이유로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죄다 잔인하게 잘랐습니다. 각각의 시신을 클로즈 업한 사진은 차마 못 올리겠습니다.
그나마 이 사진은 머리와 몸이 붙어있는 사진들이고 클로즈 업이 아니기 때문에 올렸습니다.
인간은 같은 무리들끼지 정한 규칙에 따라 같은 종족의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물입니다.
이 장면에서도 사격하는 군인 주변에 다수의 군인들이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적인 업무일 수도 있겠지요. 역시 같은 종이라는 동물적 기본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잔인함과 동격이 무관심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 이후의 장면도 차마 못 올리겠습니다. 뒷머리를 근거리 사격한 결과는 군 복무한 사람이라면 상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개인화기 소총의 탄흔은 다시 생각하기 싫지요.
전쟁터 같은 내 편 네 편이 확실히 구분되는 공간에서는 인류 박애니 하는 이야기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지금도 지구에서 하루도 없는 날이 없지요. 지진에 의한 죽음보다 더 많은 죽음이 같은 무리인 인간의 손으로 발생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런 위험성은 여전합니다. 그런 인간의 오만함과 근시안적인 '무리 인식'을 경고한 분들은 다들 성인이라 불리고 있죠. '사랑하라'는 말로 압축한 예수님이나 '자비'를 설파한 석가모니님이나...
...정말 개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무리'로써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일까요? 선할까요?
2005. 10. 9.
갑자기 옆 길로 샌 주제를 쓴 주 모씨.
일부 추가된 이미지는 잔혹할 수도 있으니 아래를 누르실 때 고려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잔인한 인간, 자연의 최소 보복
‘기생수’란 만화는 지구의 생물체 중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만화를 비롯한 이야기들에서는 지구와 인류를 파괴하는 주체적 생명체가 인간으로 흔히 설정된다. 그만큼 인간은 위험한 동물이다.
‘기생’이라는 표현도 일반적으로 다른 생명체를 이용하여 생존하는 것인데 인간에게는 부족한 듯 하다. 인간은 단순히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 이용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인간, 그리고 그 이외의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고 이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누리는 기본적 권리인양 수용한다.
그나마 문명이란 것이 등장하기 전에는 인간도 자연 중 일부로서 삶을 살아가는 생명이라 볼 수 있다. 문명이란 것이 태동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생명체 중에서 자신의 영역 표시를 담으로 하는 것은 인간 뿐이다. 동물들은 몸을 비벼 체취를 남기거나 발톱으로 긁은 표시를 한다.
생명체 중에서 자신의 이동을 위해 도로를 개설하는 것은 인간 뿐이다. 수중의 생명체는 그저 물길을 헤엄쳐 다니고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거나 초원을 뛰어다닐 뿐이다.
생명체 중에서 다른 생명체를 죽여 추위를 이기는 것도 인간 뿐이다. 심지어는 다른 생명체의 껍질을 벗겨 자기의 몸에 두르는 것이 인간이다.
생명체 중에서 다른 생명체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부위만 빼먹는 것도 인간 뿐이다. 특정 부위에는 사향노루의 배꼽, 상어의 어금니, 악어의 껍질, 물개의 거시기, 곰의 쓸개, 호랑이의 껍질과 뼈, 고래의 기름, 원숭이의 골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문제는 이 특정부위의 확보란 것이 대상 생명체에게는 생명의 상실을 의미한다.
인간의 위험성은 자만과 근시안, 잔인함으로 확대되고 있다. 인간은 당연히 다른 생명체를 어찌해도 된다는 자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백수지왕으로 군림해도 자연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리라는 근시안, 생명 연장이 아니라 유희로 다른 생명체의 생사여탈권을 만끽하는 잔인함은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둔 밤, 골목길에서 조우하게 되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은 이 같은 인간의 잔인함이 같은 종 내부에서도 적용된 결과이다. 성선설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이 잔인해 질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물론 ‘인간이 가장 잔인해 지는 시간인 8시’(?)와는 무관하다.
같은 종에게 가장 잔인할 때는 물론 전쟁이다. 사람은 어떠한 방식이든 경계가 지어지면 한 없이 잔인해 진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정점이 물론 전쟁이다. 전쟁의 참혹함, 그 결과 중 몇 컷은 아래에 올린다. 심장 약한 분은 글만 읽고 나가시길 권합니다.
지난 8일,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3만 명이 넘는 인간이 사망했으리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 같은 자연 재해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도 자연 재해에 속수 무책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지렁이부터 새들까지, 인간이 흔히 미물이라 부르는 생명체들에게 부여된 지진 예지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알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으며 동물들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름대로 대피하는 행태를 보인다. 새들도 다른 곳으로 집단 이동한다. 이 능력에서 제외된 인간은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과학 문명으로 탐사기구를 땅이나 해저에 설치하지만 지렁이의 꿈틀거림처럼 체득된 능력이 아니다. 지렁이나 그렇게 머리 나쁘다는 새들에게도 있는 자연 재해의 예지 능력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없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이 인간에게 대응한 최소한의 보복이 아닐까?
2005. 10. 9.
개인 전시회보다 네팔로 쓰레기 수거하러 간 허 작가를 생각하는 주 모씨.
잔인한 인간, 그 현장들.
(임신부나 노약자, 임신 예정자(?)도 자제 바랍니다.)
아래 사진들은 원 출처 표시가 없이 인터넷 검색으로 떠돌아 다니는 이미지들입니다.

분신은, 인간 '무리'가 하나의 인간을 죽게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달려온 경찰 두 명 외에 배경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걷고 있거나 서 있습니다. 분신 장면을 보면 방금 시작된 불길도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된 뒤입니다. 그럼에도 저런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내 편이 아니거나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태도이겠죠. 이런 상황에서 같은 종이라는 기본적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것이 더 참혹하다는 것이죠.
지구촌에서 한 국가 안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같은 국민이면서 내 편이 아니라 네 편이라는 이유로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죄다 잔인하게 잘랐습니다. 각각의 시신을 클로즈 업한 사진은 차마 못 올리겠습니다.그나마 이 사진은 머리와 몸이 붙어있는 사진들이고 클로즈 업이 아니기 때문에 올렸습니다.
인간은 같은 무리들끼지 정한 규칙에 따라 같은 종족의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물입니다. 이 장면에서도 사격하는 군인 주변에 다수의 군인들이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적인 업무일 수도 있겠지요. 역시 같은 종이라는 동물적 기본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잔인함과 동격이 무관심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 이후의 장면도 차마 못 올리겠습니다. 뒷머리를 근거리 사격한 결과는 군 복무한 사람이라면 상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개인화기 소총의 탄흔은 다시 생각하기 싫지요.
전쟁터 같은 내 편 네 편이 확실히 구분되는 공간에서는 인류 박애니 하는 이야기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지금도 지구에서 하루도 없는 날이 없지요. 지진에 의한 죽음보다 더 많은 죽음이 같은 무리인 인간의 손으로 발생했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런 위험성은 여전합니다. 그런 인간의 오만함과 근시안적인 '무리 인식'을 경고한 분들은 다들 성인이라 불리고 있죠. '사랑하라'는 말로 압축한 예수님이나 '자비'를 설파한 석가모니님이나...
...정말 개개인의 사람이 아니라 '무리'로써 인간은 종교적인 동물일까요? 선할까요?
2005. 10. 9.
갑자기 옆 길로 샌 주제를 쓴 주 모씨.
# by | 2005/10/09 22:24 | 만화말고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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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뒤에 님을 붙이는 어색함이 있어 뒤를 떼어내고 '주 님'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이 경우엔 저도 모르게 '할렐루야'로 답하는 통에 이마저도 문제이지요. 그래서 쥬피터로 하니까 좀 덜하더군요. '님'자 붙이기도 뭐 어색하지 않고 '쥬님'이니까 신성한 분 사칭하지도 않게 되구요... 흠냐.
정말.. 읔 입니다.
더한 사진도 있다고 하니..
다시는 이 지구위로 돌아오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할듯 싶습니다. ...
음....
쥬피터님..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자신이 가치있다 여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줄 알고 다른 이도 가치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판도라의 상자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희망이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꿈을 꾸겠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될 거고 세상은 좋아질 거라구요. 그거라도 없으면 어찌 살겠습니까? 한 눈 뜨고 꿈꾸는 삶을 살라는 충고도 자주 듣잖습니까? 험험...
'과연 내가 제3자의 입장이 아닌 입장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해 보면....깊어지게 됩니다.
'인간이란?''지구는 어떻게 되어가는건가'라는 생각까지 빠져버려요. 뭔가 핀트가 어긋나고 미지의 세계로...(어쩌겠슴까, 모자란것을;;) 하지만 잘못된 것을 보면 성심성의껏 욕을 한사발 할 수는 있습니다.
사진 작가의 딜레마는 여전히 논란이지요. 기아로 죽어가는 소녀 뒤의 독수리를 찍은 사진 작가가 가장 논란이 되었는데 그 사진 작가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그 아이에게 물 한 컵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세계의 기아가 얼마나 참혹한지 세계에 알리는 것도 중요했다. 나는 후자를 택했고 그것이 사진작가다.'라구요. 물론 결과는 그 사진 한장으로 지원이 쇄도했지요. 반대의 경우도 있어요. 중국의 홍수에 자전거 통행인이 맨홀에 걸려 앞으로 날아갈 듯 뒤집어 지는 장면을 기다렸다 찍은 사진. 그 사진은 괘씸하다는 평이^^;;
때론 상황 논리라는 것이 참 편하단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다가 사람은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죽고 못살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살만해 지는 것이 사람이잖아요? 물론 자포자기도 있긴 합니다만...
인간이란... 거창한 화두로 고민하지 마세요. 그냥 인간은 울퉁불퉁합니다. 장례식 상주가 슬프게 곡하다가 옆에서 옹알이 하는 갓난 자식에게 까꿍해주는게 인간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한사발, 이거 좋은 말입니다^^;; '寒沙發'이라고 김삿갓이 했던 말이기도 하지요. 차가운 모래에서 자란다는 뜻이랍니다. 원문은 '국수한사발'이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