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블로그에도 댓글이 달리고 있지만 윙크 게시판의 열기도 뜨겁다. 그 열기가 동료 연재작가인 전진석과 윙크 편집부 오경은 기자의 글로 가열된 것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폐간 혹은 연재 중단 발표에 수반되던 행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의 소회에서 밝힌 연재 중단의 이유가 ‘불황에다, 요즘의 책을 사보는 독자들에겐 버거운 작품’이었고, 잡지 만화계는 소위 ‘시장이 결정하는 작가만이 살아남는 곳’, ‘개성이나 독특한 그림과 이야기가 아닌 엽서와 판매부수만이 작가의 생명력이고 의미를 결정하는 곳’에서의 결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소회 중 특별히 공감하는 내용은 이것이다.
‘잡지 안에서는 자라서는 안 되는 룰이 있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도태이니까요. 언제까지나 피터팬으로 남아야만이 소위 밥 벌어 먹을 수 있습니다.’
‘작가도 독자도 자라고 변해야 합니다. 작자가 자라고 변하면 영향력 있는 독자는 외면하고, 독자가 자라고 변하면 작가는 중학생 수준에 있습니다.’
이번 [더 칸]의 연재 중단은 한국 만화의 다양한 현재를 드러낸다.
1. 피터팬을 권하는 만화계
작가의 소회 중에 등장한 ‘피터팬이 되어야 하는 작가’는 한국만화의 제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창작의 영역과 독자의 영역에 모두 해당되는 말이며 이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맞물려 있다.
흔히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는 1980년대라고 말한다. 만화를 포함한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이때처럼 다양한 장르가 만개한 시기는 전무후무할 정도이다. 실험적인 작품에서부터 철저히 상업적인 작품까지 각자 고유의 영역을 지니고 활발하게 세상에 등장했다. 프로와 언더는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지향의 차이였으며 뽕짝과 클래식은 서로를 백안시하지 않았다. 공장만화에서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작품이 발표되고 서점에서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명랑 만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겉모습이 조금 촌스럽고 조악했을지 몰라도 그 페이지 곳곳에는 활발한 생동감이 담겨 있었고 열린 가능성을 늘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장발은 장발대로, 교복은 교복대로, 넥타이는 넥타이대로 몰리고 떠들 공간과 이슈가 충만한 시절이었다.
만화로 돌아본다면 1970년대부터 제자리를 찾아 간 성인만화가 1980년대에는 청소년만화와 함께 성인극화로 양대 산맥을 형성한 시기이다. 이현세, 허영만, 고우영과 함께 탁영호와 최정현, 장진영이 활동했고 김형배의 활동도 전성기였다. 1985년과 1987년에 창간한 ‘만화광장’과 ‘주간만화’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의 결과이기도 하다. 1980년대를 떠올리면 ‘공포의 외인구단’, ‘신의 아들’, ‘불청객’, ‘무당거미’, ‘헬로 팝’, ‘서울 손자병법’, ‘고인돌’, ‘객주’, ‘바리데기’, ‘임꺽정’, ‘장길산’, ‘졸부로소이다’, ‘한겨레 만평’, ‘간판스타’, ‘부자의 그림일기’, ‘포장마차’, ‘오 한강’, ‘학마을 사람들 이야기’, ‘멋쟁이 우리 형’, ‘북해의 별’, ‘러브 메이커’, ‘퇴색공간’, ‘영심이’,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그리고 ‘드래곤 볼’......퍼뜩 생각나는 1980년대는 작가로 하여금 피터팬이 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찾을 수 없었다. 그 강요가 있었다면 스스로의 성향이지 만화계 구조에 의한 강요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만화작가는 왜 피터팬으로 살기를 강요받는가.
성장이란 또래의 공동 성장을 전제로 한다. 혼자만 늙어 가면 무슨 재미로 사나. 또래의 공동 성장이 없는 경우 개인의 성장은 결국 이질감으로 나타난다. 뭔가 다른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만화작가의 성장은 그 성장을 포용해 줄 또래의 성장이 병행되지 않을 때 주류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작품으로 나타난다. 뭔가 있어 보이지만 성공하기는 힘든 작품이 된다. 그래서 또래라고 우길만한 그룹에 동화되기 위해서 ‘피터팬’이 되어야 한다. 성장을 거부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만화의 불행을 낳는 이유 중 하나이다.
작가의 성장이나 성향에 따라 꼬맹이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부터 어른의 고민을 함께 풀어 줄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다. 이것이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세상이나 우리 만화에서는 대중문화가 그렇듯이 위 아래로 만개하지 못한 허리에 집중한 모양새로 치우쳐 있다. 만화와 영화와 게임과 음악의 거대한 바다는 십대와 이십대이다. 게다가 십대는 후반부이고 이십대는 전반부를 지칭한다. 이 좁은 수용자의 스펙트럼에 모든 대중문화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 이 범위를 벗어나거나 이 범위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재는 실험적인 것이 되고 마이너리티가 된다. 1980년대의 소재 선택과 작가 성향이 개인의 지향에 의한 것이라면 현재의 그것은 구조에 의한 떠밀림이라는 것이 비극이다. 그 비극적 사례에 ‘더 칸’이 추가되려고 한다.
2. 규모의 경제와 문화 다양성
개개의 중요성이 지니는 가치는 어느 선까지 유효할까를 고민한다. 청성산 지킴이인 지율 스님 개인의 중요성과 수 조원의 국책사업자금의 가치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특정 작품의 중요성이 6천 억 출판만화 시장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 지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개개의 무엇이 지니는 가치가 폄하되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가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가치의 보호이다.
만화에 있어서 실험적이거나 비 상업적이거나 단편이거나 일반적 만화 스타일을 벗어난 것이라고 해서 무시될 이유는 없다. 규모의 경제에서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현실이 문제이다. 문화 다양성이란 개개의 장르가 어느 정도의 시장 성공을 노릴 수 있는 밭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느 문화가 소외되거나 시장 한 켠으로 밀려나지 않는 그런 모양새를 말한다. 물론 주류는 다양성의 시대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양성의 기본은 어느 하나의 분야와 범위에 올 인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현재의 만화 다양성 부재는 개개의 분야들이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한다는 결과를 낳고 결국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분야로 집중하는 악순환을 보인다. 경제 논리가 문화 분야에서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이 비극이다. 중요한 하나의 요소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은 비극이다. 편집부의 고민도 물론 있었을 터이지만 결국 드러난 이유는 얼마나 팔리는가에 올 인한 것이다. 독자의 반응이나 이해의 범주를 넘었다는 것은 팔리지 않는다의 다른 표현이다. 편집부의 결정권은 경영진의 경영 시각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회사의 생리다. 이 생리적 현상의 결과로 ‘더 칸’이 연재마저 이어가지 못하게 됐다. 개개의 문화 가치가 경제 논리에 완패하는 비극적 사례이다.
3. 인터넷 여론의 오프라인 영향력
최근 사례로 ‘영점프’와 ‘오후’의 폐간, 그리고 다른 사례에서 개별 잡지의 연재작 중단 때의 네티즌 반응은 어떻게 봐야 할까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네티즌 반응의 중심 흐름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사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안타깝다’
‘살려 내라, 이 나쁜 놈들아’
‘아, 한국만화판이 이렇지 뭐’
물론 세 의견이 무시될 의견들이 아니나 인터넷의 유일한 흔적인 글 올리기와 덧글 달기 외에 접속조차 하지 않는 다수의 대중은 ‘무관심’일 뿐이다. 그럼에도 흔히 네티즌의 글이 전체의 의지처럼 여론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의 반대편에는 오프라인의 결과들이 있다. 여론이 이렇다면 폐간이 되지 않았을 터이고 연재 중단이 되지 않았어야 옳다. 최소한 연재 중단이나 폐간 결정이 후회스러운 것이 되어야 맞다. 그런데 지금가지 폐간과 연재 중단이 번복된 사례도 없고 경영 시각에서 후회스러웠다는 증언도 들은 바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터넷 여론이 반드시 오프라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군 전차의 여학생 살해 사건의 경우는 인터넷 여론이 오프라인으로 결집한 사례이다. 이런 사례는 물론 많이 있다. 하지만 만화의 경우 ‘다음’ 같은 거대 포탈에서 캠페인(좋은 만화 보기)을 해도 이를 위한 촛불 집회는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영향력 부재는 만화라서 그렇기 보다는 영향력이 반드시 있으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이슈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감대 형성에 만화는 2% 부족한 문화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달리 보면 폐간 혹은 연재 중단을 결정한 입장에서 오프라인의 변화 추이를 잠시만 지켜보면 된다. 정말 이 결정이 후회될 만큼 시장의 변화가 보이는가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향이랄 수도 없는 미미한 것이었음을 보게 되고 그에 따라 번복이 없는 만화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 만화여론의 국민적 공감대 형성력 한계이기도 하다.
만화에서 인터넷 여론의 승리라면 몇 작품의 재간이나 복간을 성공시킨 사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여론의 승리라기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프라인에서 재간 또는 복간한 사전 구매자가 결정되었기에 진행된 사안이다. 단순히 ‘재간하라’는 여론만으로 성공된 사례가 아니다.
결국 규모의 시장 부재와 연결된 현상으로 향후 우리 만화가 성공하려면 판을 키워야 하고 다양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원론적 필요성을 재삼 강조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늘 차용된 문장, 창작 여건의 강화가 진정으로 필요하고 다양한 매체의 확보가 요구되며 다양한 문화 수용이 가능하도록 문화판의 체질 변화와 시스템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은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작가라는 개인, 독자라는 대상 그룹이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전체가 각자의 영역에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모색하고 변화해야 한다. 이것이 실현되기 전까지 ‘더 칸’과 같은 시대의 희생물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지속적인 사례 발생은 피터팬이기를 거부하거나 되지 못한, 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의 순교를 강요할 것이다.
2005. 8. 21.
어디 연재 이어갈 매체 없나 찾고 있는 주 모씨.
덧글
그보다... 윙크 홍보문을 바꿔야겠군요.
'대한민국 대표 순정만화잡지'라니요...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ㅡ ㅡa
윙크라는 잡지의 틀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뮤 칸은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여기서도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 ^
댕기나 윙크들에선 실험적인 작품들도 한때 나왔었는데
요즘은 사정이 그렇게 되었나보군요..
연재중지라니 이건 정말 아쉽다는..
'츠바이'라는 팔콤사의 게임을 한국에 정식발매 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반발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정발해 달라는 서명운동을 펼쳐 결국 정발이 이뤄졌지만..
결국 게임은 그 정발을 바라는 서명자 수보다도 안 팔렸다는..
위에 살짝 '비판'적 의도로 적으신듯 한 '사려고 생각했다'는 사람들. 결국 안 사고 있었다는 것이고, 공짜로 보고 있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모르겠군요(개인적으론 때려주고 싶어집니다만..)
아니 요즘이 아니라 예전부터 쭈욱 언제까지나(?????) 얼어붙어있는것 같습니다..
아예 시장 자체가.. 다른 외국이랑 틀리더라는..
울나라는 무조건 트렌드죠.. 유행따라 쉬쉭 너도나도~ 그러다 또
불꽃 사그라들듯 사라짐과 동시에 또 다른 유행이 ㅡㅡ;;
얼마전에 출판사 관계자분이랑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옆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단 500부가 팔릴 수 있을것 같은 내용이라
할지언정.. 일본은 책으로 만든데요..
(제가 일본여행을 갔을때도 제일 놀라웠던게 서점에 가서 였거든요..)
울나라는 안그렇죠.. 참 그런게 어떻게 보면 안타까워요..
만화쪽은 더 그렇고..
문화를 즐기는것이 아니라 유행을 즐기는 문화민족이라고 봐야하지않을까요?물론 여기서도 전부는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좋아하는 만화나 연재물, 소설 등은 꼭 사서 보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이러더군요. "너 돈도 참 많다". 안타까운 현실이랄밖에요.
그리고 만화나 소설을 돈 많아서 사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구하는 당연한 것이니 편하게 넘겨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냥 부동산 투자하는 사람들에게 '너 돈도 참 많다'라고 말하면서 풀어 버리시길, 쿨럭.
조만간 이런 작품들이 자유롭게 연재할 매체가 등장한다지만 종이 매체의 매력은 여전히 가볍지 않습니다. 웹진의 보충이 아쉬운 까닭이지요.
연재를 이어갈 잡지라면 현재는 허브밖에 없지 않을까 해요.
현재 이어갈 오프라인 매체 후보는 허브 뿐입니다만 그것이 아니면 두 가지 방법 뿐이죠. 홈에 업데이트 한 뒤 단행본 출판을 알아 보는 것과 웹진 연재 공간을 알아보는 것. 둘 다 어려워지긴 마찬가지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결론 날 공산이 큽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