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7월 20일
거시기 능력 평가
작년이던가? 엽기 사이트에서 신개념 네비게이션을 봤다.
거시기를 하기 전에 링 형태로 남성의 거시기에 부착하고 이어폰을 꼽으면 이런 거시기한 방송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지금 좌측으로 세번 진입 시도 하세요"
"빠르게 후진했다가 다시 일방통행 진입하세요"
"잠시 후 급가속 지점입니다"
"유턴 지역입니다."
"지금은 빨간 불입니다. 진입할 수 없습니다"
"위험지역입니다. 남편이 도착했습니다"
......
퍼펙트한 sexual intercourse를 위한 신개념 네비게이션의 발상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멜 깁슨이 주연했던가? 여성의 속마음이 귀에 들리는 능력이 갑자기 생긴 주인공의 해프닝에서 한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자신이 바라는 것'인데 상대 여성의 생각이 귀에 들리는 주인공이야 오죽 잘 알아서 했겠는가? 그 장면 이후에 여성이 내뱉는 한 마디,'놀라워, 당신이 내 머리 속에 들어 온 것 같아'였다.
현실에서는 물론 신개념 네비게이션도 없고 벼락에 맞는다고 해서 멜 깁슨의 초능력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도 없다. 그러니 현실의 인간들은 불철주야 홀로 갈고 닦아야 한다. 문제는 사람들 간의 의사 소통 방식이 손짓 발짓부터 언어와 문자, 문명 이기를 수단으로 하는 각종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이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어느 이웃 간의 의사전달과 이해의 깊이를 보자.
삼식이네 집과 삼순이네 집은 이웃 간이다. 어느 날 쓰레기 분리 수거 때문에 작은 다툼이 발생했다. 그러다 담장 넘어 가지를 뻗은 나무 때문에 또 한 라운딩 뛰고 또 야간에 찾아 온 손님의 시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점점 붉어지게 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삿대질도 오갔다.
그리고 대화는 단절되고 골목에서 만나도 못본 척 회피하게 된다. 그런데 이웃이라는 물리적 가까움이 상황을 꼬이게 한다. 어느 날 삼식이 집에 손님들이 왕창 왔는데 갑자기 꼭 필요한 무엇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옆 집 삼순이네로 가서 그 물건을 빌려야 하는데 이 옆집까지 걸어가는 1분 동안 혼자 생각을 한다.
'지난 번에 싸우고 아직까지 말 안하고 지냈는데 지금 가서 빌려 달라면 빌려 줄까?'
'에이, 그냥 없는대로 친구들 술 먹일까?'
'아니야, 그래도 서로 고소 고발한 것은 아니니까 빌려 주겠지.'
'아니야, 있는 거라도 안 빌려 준다고 창피 줄지도 몰라'
이러면서 삼순이네 초인종을 누른다. 삼순이가 나올 그 몇 초 동안 지금까지 했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재생, 반복, 증폭된다. 그러다 문을 열고 나온 삼순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거 안 빌려 줘도 되요!"
삼순이는 멍하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지간한 물건을 빌려달라면 안 빌려 줄 것도 아니었고 도대체 왜 저 넘이 대뜸 초인종 누르고 이 밤에 생뚱맞게 시비를 걸고 튀어 가는지 이해 불능이다.
오해는 사소함에서 시작되지만 이해는 원어의 의미처럼 상대보다 아래에 위치해 보기 전에는 쉽지 않다. 게다가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 범위와 상대의 이해 범위를 동일시 한다. '미안하다'고 말한 뒤 상대가 '됐어'라고 한 말을 완전한 해소로 받아 들이기도 한다.
이처럼 일반적 생각의 소통도 완전치 못한데 섹슈얼 인터코스에 관해서는 더더욱 어렵다. 뽀르노 무비에서는 '오 예, 거기...' 어쩌구 하는 대사가 나오지만 그것이 매번 정확한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라는 표현은 사실 정확한 번지수를 알려 주지도 않는다. 정확하게 하려면 좌로 몇 클리크, 위로 몇 클리크(총구 조절하는 방식)라고 주문하거나 위도와 경도 교차점을 알려 주던가 해야지.
그러니 독실한 크리스찬끼리 결혼한 신혼부부가 첫날 밤 드리는 기도가 서로 다른 것이다.
신랑이 이렇게 기도를 한다.
"주여,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주절주절"
신부가 이렇게 기도를 한다.
"주여, 저이에게는 인내를, 그리고 인도는 저에게 맡기소서"
이러한 기도에 순명하지 않고 신랑이 멋대로 굴면 그 다음 날부터는 밤마다 고사성어나 공부해야 한다. 신랑의 '질문공세'와 신부의 '문전박대'가 팽팽하게 창과 방패로 휘둘려 진다.
미묘한 네비게이션이 필요한 것을 하나씩 매 순간마다 의사소통할 수가 없으니 일반적인 룰을 정한다. 그것이 남자의 '버팀'과 '인내'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에 의한 규범이다. 수맥을 찾을 때 한 번 찔러서는 찾지 못하더라도 100번을 찔러보면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버티다 보면 소가 뒷걸음 치다가 어쩌는 식으로 완벽하게 맞는 순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고인이 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이 그간 만나왔던 남자들의 섹슈얼 인터코스 능력과 만족도를 10점 만점제로 점수를 부여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제기한 이가 별점을 치는 점성술가이고 다이애나와 어울렸던 시기가 1년 정도라 주장의 사실성이 그다지 담겨 있지는 않다. 그저 저렇게 점수가 매겨지는 것에는 어느 한쪽의 능력 부족이나 다른 한 쪽의 불감증보다 의사소통의 문제가 더 크기 때문이다.
문제의 책 [다이애나,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영예의 만점을 받았고 승마 코치였던 제임스 휴잇이 아쉬운 9점, 미술품 거래상인 홀리버 호어라는 사람은 6점을 다이애나로부터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0점 만점이라는 것은 체조에서 본 점수와 같은데 이 의미는 완벽하다는 것이다.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함은 적어도 이 점수를 부여한 다이애나 입장에서 완벽한 일치감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케네디 가의 저력이 새롭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참고로 남편이었던 찰스 왕세자에게 부여한 점수는 처참하게도 '1점'이다. 이 말은 황신혜와 문성근이 주연한 영화에서 남편은 성실했다고 주장하고 아내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법정 진술 과정에 녹아 있다. 남편은 졸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내는 그냥 잠이나 자라고 했고. 이 둘의 인식차는 클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그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몇시예요?'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늘이 왜 파란 줄 아세요?'라는 복합적 의미를 내포한 것들은 온전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기 어렵다. 게다가 말도 없이 그저 째려봄으로서 자신을 전달하거나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잡은 손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도 의사 소통을 시도하는데 그 상대의 뇌를 헤집어 보기 전에야 온전한 이해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최소한 오래 같이 살았기 때문에 '툭하면 척이다'는 식으로 예단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늘 대화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에는 어느 정도 기술도 필요하다. 어느 날, 매번 하던 농담으로 '야, 또 공기밥 추가냐?'라는 소리에 벌컥 화를 내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그 날 다른 무엇이 있거나 아니면 당신이 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래저래 타인과의 소통은 조심스럽다.
그나저나 난 몇 점일까?
2005. 7. 15.
주 모씨.
거시기를 하기 전에 링 형태로 남성의 거시기에 부착하고 이어폰을 꼽으면 이런 거시기한 방송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지금 좌측으로 세번 진입 시도 하세요"
"빠르게 후진했다가 다시 일방통행 진입하세요"
"잠시 후 급가속 지점입니다"
"유턴 지역입니다."
"지금은 빨간 불입니다. 진입할 수 없습니다"
"위험지역입니다. 남편이 도착했습니다"
......
퍼펙트한 sexual intercourse를 위한 신개념 네비게이션의 발상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멜 깁슨이 주연했던가? 여성의 속마음이 귀에 들리는 능력이 갑자기 생긴 주인공의 해프닝에서 한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자신이 바라는 것'인데 상대 여성의 생각이 귀에 들리는 주인공이야 오죽 잘 알아서 했겠는가? 그 장면 이후에 여성이 내뱉는 한 마디,'놀라워, 당신이 내 머리 속에 들어 온 것 같아'였다.
현실에서는 물론 신개념 네비게이션도 없고 벼락에 맞는다고 해서 멜 깁슨의 초능력이 인간에게 나타날 수도 없다. 그러니 현실의 인간들은 불철주야 홀로 갈고 닦아야 한다. 문제는 사람들 간의 의사 소통 방식이 손짓 발짓부터 언어와 문자, 문명 이기를 수단으로 하는 각종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이해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어느 이웃 간의 의사전달과 이해의 깊이를 보자.
삼식이네 집과 삼순이네 집은 이웃 간이다. 어느 날 쓰레기 분리 수거 때문에 작은 다툼이 발생했다. 그러다 담장 넘어 가지를 뻗은 나무 때문에 또 한 라운딩 뛰고 또 야간에 찾아 온 손님의 시끄러움 때문에 얼굴이 점점 붉어지게 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삿대질도 오갔다.
그리고 대화는 단절되고 골목에서 만나도 못본 척 회피하게 된다. 그런데 이웃이라는 물리적 가까움이 상황을 꼬이게 한다. 어느 날 삼식이 집에 손님들이 왕창 왔는데 갑자기 꼭 필요한 무엇이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옆 집 삼순이네로 가서 그 물건을 빌려야 하는데 이 옆집까지 걸어가는 1분 동안 혼자 생각을 한다.
'지난 번에 싸우고 아직까지 말 안하고 지냈는데 지금 가서 빌려 달라면 빌려 줄까?'
'에이, 그냥 없는대로 친구들 술 먹일까?'
'아니야, 그래도 서로 고소 고발한 것은 아니니까 빌려 주겠지.'
'아니야, 있는 거라도 안 빌려 준다고 창피 줄지도 몰라'
이러면서 삼순이네 초인종을 누른다. 삼순이가 나올 그 몇 초 동안 지금까지 했던 생각은 꼬리를 물고 재생, 반복, 증폭된다. 그러다 문을 열고 나온 삼순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거 안 빌려 줘도 되요!"
삼순이는 멍하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지간한 물건을 빌려달라면 안 빌려 줄 것도 아니었고 도대체 왜 저 넘이 대뜸 초인종 누르고 이 밤에 생뚱맞게 시비를 걸고 튀어 가는지 이해 불능이다.
오해는 사소함에서 시작되지만 이해는 원어의 의미처럼 상대보다 아래에 위치해 보기 전에는 쉽지 않다. 게다가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 범위와 상대의 이해 범위를 동일시 한다. '미안하다'고 말한 뒤 상대가 '됐어'라고 한 말을 완전한 해소로 받아 들이기도 한다.
이처럼 일반적 생각의 소통도 완전치 못한데 섹슈얼 인터코스에 관해서는 더더욱 어렵다. 뽀르노 무비에서는 '오 예, 거기...' 어쩌구 하는 대사가 나오지만 그것이 매번 정확한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라는 표현은 사실 정확한 번지수를 알려 주지도 않는다. 정확하게 하려면 좌로 몇 클리크, 위로 몇 클리크(총구 조절하는 방식)라고 주문하거나 위도와 경도 교차점을 알려 주던가 해야지.
그러니 독실한 크리스찬끼리 결혼한 신혼부부가 첫날 밤 드리는 기도가 서로 다른 것이다.
신랑이 이렇게 기도를 한다.
"주여,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주절주절"
신부가 이렇게 기도를 한다.
"주여, 저이에게는 인내를, 그리고 인도는 저에게 맡기소서"
이러한 기도에 순명하지 않고 신랑이 멋대로 굴면 그 다음 날부터는 밤마다 고사성어나 공부해야 한다. 신랑의 '질문공세'와 신부의 '문전박대'가 팽팽하게 창과 방패로 휘둘려 진다.
미묘한 네비게이션이 필요한 것을 하나씩 매 순간마다 의사소통할 수가 없으니 일반적인 룰을 정한다. 그것이 남자의 '버팀'과 '인내'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률에 의한 규범이다. 수맥을 찾을 때 한 번 찔러서는 찾지 못하더라도 100번을 찔러보면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버티다 보면 소가 뒷걸음 치다가 어쩌는 식으로 완벽하게 맞는 순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각설하고, 고인이 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빈이 그간 만나왔던 남자들의 섹슈얼 인터코스 능력과 만족도를 10점 만점제로 점수를 부여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제기한 이가 별점을 치는 점성술가이고 다이애나와 어울렸던 시기가 1년 정도라 주장의 사실성이 그다지 담겨 있지는 않다. 그저 저렇게 점수가 매겨지는 것에는 어느 한쪽의 능력 부족이나 다른 한 쪽의 불감증보다 의사소통의 문제가 더 크기 때문이다.
문제의 책 [다이애나,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영예의 만점을 받았고 승마 코치였던 제임스 휴잇이 아쉬운 9점, 미술품 거래상인 홀리버 호어라는 사람은 6점을 다이애나로부터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0점 만점이라는 것은 체조에서 본 점수와 같은데 이 의미는 완벽하다는 것이다.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함은 적어도 이 점수를 부여한 다이애나 입장에서 완벽한 일치감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케네디 가의 저력이 새롭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참고로 남편이었던 찰스 왕세자에게 부여한 점수는 처참하게도 '1점'이다. 이 말은 황신혜와 문성근이 주연한 영화에서 남편은 성실했다고 주장하고 아내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법정 진술 과정에 녹아 있다. 남편은 졸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내는 그냥 잠이나 자라고 했고. 이 둘의 인식차는 클 수밖에 없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그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몇시예요?'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늘이 왜 파란 줄 아세요?'라는 복합적 의미를 내포한 것들은 온전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기 어렵다. 게다가 말도 없이 그저 째려봄으로서 자신을 전달하거나 단순히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잡은 손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도 의사 소통을 시도하는데 그 상대의 뇌를 헤집어 보기 전에야 온전한 이해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최소한 오래 같이 살았기 때문에 '툭하면 척이다'는 식으로 예단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늘 대화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에는 어느 정도 기술도 필요하다. 어느 날, 매번 하던 농담으로 '야, 또 공기밥 추가냐?'라는 소리에 벌컥 화를 내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그 날 다른 무엇이 있거나 아니면 당신이 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래저래 타인과의 소통은 조심스럽다.
그나저나 난 몇 점일까?
2005. 7. 15.
주 모씨.
# by | 2006/07/20 13:16 | 만화말고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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