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2월 05일
운전보다 복잡한 삶
('아라한'도 고민한다는데 뭐 어때? '아귀'만 아니면 되지...)

1.
운전면허 중에 '장롱면허'라는 표현이 있다. 면허는 있는데 운전을 하지 않고 집 장롱에 두고 살았다는 말이니, 당연히 운전을 못하는 면허소지자를 말한다. 남이 비하해서 말하기보다는 스스로 사용하는 용례도 많다. 그것은 이런 상황이 크게 부끄럽다거나 민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운전이 그저 차를 움직이게 하고 세우는 것이라면 요즘 자동변속장치 차량으로 '단번'에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운전'이란 행위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시속 20km 이하로 전진만 하고 브레이크만 밟아댄다면 흔히 말하는 '도로'에 올라 설 수 없다. 차선 변경도 못하고 후진은 꿈도 꾸지 못하니 동네 한 바퀴 시운전하려다가 만약 국도 외길로 접어 든다면 '문근영 주유소 찾기' 광고의 주인공이 된다.
장롱에서 면허를 꺼내어 운전 실력을 갈고 닦는다면 보통 3년 차에 가장 물이 오른다고 볼 수 있다. 직진 전문에서 차선변경의 구렁이 레벨이 가능하고 끼어 들기에는 한치의 오차 없이 선수를 칠 수 있다. 두 손과 등에 땀이 흥건하던 초짜 시절은 까마득하고, 이젠 운전하면서 음악 감상에 옆 차선의 이쁜 여성 운전자도 힐끔거리며 라면 국물까지 마실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 그래서 큰 사고는 3~5년차 운전자에게 높다. 초짜야 사고라 해도 서 있는 차를 뒤에서 들이 박거나 제 혼자 골목 주차한다고 남의 집 담벼락에 차를 긁어 버리는 정도다. 하지만 이제 카 레이서도 우습게 볼 연차의 사고는 급가속 추월의 정면 충돌이거나 서울-부산 3시간 주파 기록 갱신 중에 전복되는 등 그 형태가 9시 뉴스 감이다.
어중간한 시기를 지나 10년 무사고 소리를 들을 연차가 되면 이젠 운전자의 모습에서 '유연함'을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차가 무식하게 끼어 들면 '에이, 그 놈 디게 급한가 보네, 저러다 사고 나지.' 정도의 혼자 소리로 차창 밖 욕설을 대신하고 서울-부산을 죽기 살기로 밟아 대지 않는다. 그러니 부산 가려다가 끼어 든 놈 추월한다고 강릉으로 빠질 이유도 없다.
2.
운전하는 것보다 사는 것이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그냥 밥 먹고 싸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IQ 한 자리 물고기도 살아 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단번'에 살아 갈 수 있다. 하지만 살아 간다는 것은 먹고 싸는 것 외에 너무나 방대하고 심대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상호 간섭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데 때론 면도를 할까 말까 정도의 일상도 있겠지만, 결혼을 할까 말까처럼 평생을 건 도박(http://jumosee.egloos.com/2368362 이 글과 같은 이유에서 도박이란 용어를 썼으니 오해 마시길)도 있고 잠시의 '욱!'하는 분노를 못 이겨 사람을 죽일지 말지 흥분 중에 고민할 수도 있다. 매 순간의 선택이 무엇이든 기어 변속이나 차선 변경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서 사는 것이 더 복잡성을 지닌다는 것은 '당연'이다.
하지만 운전과 사는 것를 보면 연차가 꼭 성숙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보인다. 10년 무사고 운전자도 늘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듯이 매 순간 선택으로 점철된 삶을 10년 동안 별탈 없는 결정으로 살았다고 해서 남은 생이 불변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10년 사고 경력자도 향후 무사고 운전자가 될 수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더라도 남은 생도 그러해야 한다는 규제도 없다. 그렇게 시간은 사람에게 유연한 얼굴을 보여 줄 뿐이다. 왜냐하면 차선을 바꾸거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은 운전자 자신이며 살아 가는 자신이지 다른 누구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운전의 방법을 단번에 깨달을 수 없지만, 삶의 의미란 것은 더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저 언덕 너머'의 무엇이라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이 있다. 육조단경에서부터 비롯된 깨달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지만 한국에서는 성철 스님의 말씀으로 오래된 의문이 증폭되었다.
여전히 해석상의 이견들이 있지만 일반인도 많이 들어 봤을 용어,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이다. 아주 무식하게 줄여서 설명하자면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돈오돈수, 점차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거나 깨달은 이후에도 이를 증대시켜 나아가는 것이 돈오점수이다.
나는 비교종교학에 관심이 많은데, 그 분야를 안다기보다 그러한 접근 방식이 나에게 맞는다는 의미이다. 돈과 점에 대한 의견 중에서 동조하는 견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같다. 단번에 대각을 했다(돈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있으므로 이를 점진적으로 벗어나려는 보살행이 필요(점수)하니 어느 하나만 옳다고 할 수 없다."
"대각을 한 뒤 수행이 필요하다면 이는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근처에 갔을 뿐이다."
"대각은 갑자기 오는 것으로 알지만 그 이전에 꾸준한 수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점수가 돈오를 낳는다."
이러한 이견의 꼬리들을 정리한 견해는 성철 스님이 떠난 뒤에 여러 사람들이 발표했는데 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예수회 신부 베르나르도 스니칼)는 예수와 제자의 삶을 통해 설명했다. "요단강 세례 때 예수의 깨달음이 돈오였을 터이다. 이 체험 이후 죽을 때까지 진리 안에서 남을 위해 살았던 예수는 돈수였다. 그러나 제자들과 신약의 다른 인물들은 스승의 부르심에 돈오했지만 이후 지속적 수행을 필요로 했다는 면에서 점수라 볼 수 있다."며 "성철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기초하여 돈오돈수를 알리고자 했고, 보조 스님은 일반 중생의 입장에서 돈오점수를 전하고자 했다고 해석한다."고 성철 스님을 추모했다.
4.
운전에는 단번에 깨닫는 돈오가 없지만 삶에는 돈오가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 점수가 필요할 것이다. 달리 점수를 말하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찰'은 시도할 수 있을 터이고 종교인이라면 '기도'나 '예불', '예배',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살아 가는 삶을 통해서 돈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깨달음에 근거하여 흔들림 없이(그리고 본질적 가치의 의미에서) 돈오를 설파한 성철 스님과 달리 나같은 범인은 완전한 대각을 이루기가 요원하다. 불교의 용어처럼 '견성'이나 '한 소식'을 듣는 경험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이후 완전한 이타행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는 확약이 아니므로 결국 돈오점수에 더 현실성을 두게 한다. 오죽하면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는 '아라한'조차 '오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는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항상 점수해야 하지 않을까?
5.
종교인이라는 공인된 절차를 밟은 이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수계가 됐든 세례가 됐든 그 이후로 수 십년 기도를 한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런데 과문해서인지 나는 돈오한 사람(나를 포함해서)을 보지 못했다. 깨달음의 결과는 돈오돈수이며 부활이라 생각된다. 이전의 것과 완전히 결별하고 자기가 깨달은 바 대로 완전히 새로운 선택들만 하는 삶이 돈오돈수이며 부활이다. 그런데 그러자고 종교의 삶을 선택한 이들 중에 '점수'보다 못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다. 어느 정도 많은가를 개인적 경험으로 본다면 압도적이라 할 만 하다. 껍데기는 종교적 삶(아주 단순하게 선한 삶이라고 치자)을 선택한 자라고 하면서 속알맹이는 그저 제 성격대로 가는 것이다.
욕쟁이는 신자생활 10년에도 욕을 하고 사기꾼은 또 사기를 친다. 기도하러 가면서 옆 차랑 삿대질하고 인류를 위해 기도하면서 윗 층과 소음 송사를 벌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각이며 부활이며 이타행을 떠들기보다 아주 소극적이지만 '유연함'을 기억하는 것도 좋다. 적어도 '무사고 10년이니 이젠 달려도 되'라거나 '내 나이 50인데 젊은 것들이 어딜?'이라는 단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돈오할 가능성이 있다. '내가 항상 옳다'는 것은 대각한 사람이 할 말이지 점수하고 있거나 점수할 맘조차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옳은 것이 옳은 것이지 내가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성찰하는 사람은 아직 돈오할 가능성이 있다.
2007. 2. 5.
오랜 신앙생활을 자랑하던 이가 오랜 버릇대로 패악한 것을 보고-
성찰을 술로 하는 주 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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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阿羅漢/arhat /(팔)arahant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말하며 보통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生)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동의어 '나한'은 산스크리트 'Arhan'을 음역한 아라한을 줄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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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전면허 중에 '장롱면허'라는 표현이 있다. 면허는 있는데 운전을 하지 않고 집 장롱에 두고 살았다는 말이니, 당연히 운전을 못하는 면허소지자를 말한다. 남이 비하해서 말하기보다는 스스로 사용하는 용례도 많다. 그것은 이런 상황이 크게 부끄럽다거나 민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운전이 그저 차를 움직이게 하고 세우는 것이라면 요즘 자동변속장치 차량으로 '단번'에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운전'이란 행위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시속 20km 이하로 전진만 하고 브레이크만 밟아댄다면 흔히 말하는 '도로'에 올라 설 수 없다. 차선 변경도 못하고 후진은 꿈도 꾸지 못하니 동네 한 바퀴 시운전하려다가 만약 국도 외길로 접어 든다면 '문근영 주유소 찾기' 광고의 주인공이 된다.
장롱에서 면허를 꺼내어 운전 실력을 갈고 닦는다면 보통 3년 차에 가장 물이 오른다고 볼 수 있다. 직진 전문에서 차선변경의 구렁이 레벨이 가능하고 끼어 들기에는 한치의 오차 없이 선수를 칠 수 있다. 두 손과 등에 땀이 흥건하던 초짜 시절은 까마득하고, 이젠 운전하면서 음악 감상에 옆 차선의 이쁜 여성 운전자도 힐끔거리며 라면 국물까지 마실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 그래서 큰 사고는 3~5년차 운전자에게 높다. 초짜야 사고라 해도 서 있는 차를 뒤에서 들이 박거나 제 혼자 골목 주차한다고 남의 집 담벼락에 차를 긁어 버리는 정도다. 하지만 이제 카 레이서도 우습게 볼 연차의 사고는 급가속 추월의 정면 충돌이거나 서울-부산 3시간 주파 기록 갱신 중에 전복되는 등 그 형태가 9시 뉴스 감이다.
어중간한 시기를 지나 10년 무사고 소리를 들을 연차가 되면 이젠 운전자의 모습에서 '유연함'을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차가 무식하게 끼어 들면 '에이, 그 놈 디게 급한가 보네, 저러다 사고 나지.' 정도의 혼자 소리로 차창 밖 욕설을 대신하고 서울-부산을 죽기 살기로 밟아 대지 않는다. 그러니 부산 가려다가 끼어 든 놈 추월한다고 강릉으로 빠질 이유도 없다.
2.
운전하는 것보다 사는 것이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그냥 밥 먹고 싸는 것이 사는 것이라면 IQ 한 자리 물고기도 살아 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단번'에 살아 갈 수 있다. 하지만 살아 간다는 것은 먹고 싸는 것 외에 너무나 방대하고 심대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상호 간섭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데 때론 면도를 할까 말까 정도의 일상도 있겠지만, 결혼을 할까 말까처럼 평생을 건 도박(http://jumosee.egloos.com/2368362 이 글과 같은 이유에서 도박이란 용어를 썼으니 오해 마시길)도 있고 잠시의 '욱!'하는 분노를 못 이겨 사람을 죽일지 말지 흥분 중에 고민할 수도 있다. 매 순간의 선택이 무엇이든 기어 변속이나 차선 변경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서 사는 것이 더 복잡성을 지닌다는 것은 '당연'이다.
하지만 운전과 사는 것를 보면 연차가 꼭 성숙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보인다. 10년 무사고 운전자도 늘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듯이 매 순간 선택으로 점철된 삶을 10년 동안 별탈 없는 결정으로 살았다고 해서 남은 생이 불변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10년 사고 경력자도 향후 무사고 운전자가 될 수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더라도 남은 생도 그러해야 한다는 규제도 없다. 그렇게 시간은 사람에게 유연한 얼굴을 보여 줄 뿐이다. 왜냐하면 차선을 바꾸거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은 운전자 자신이며 살아 가는 자신이지 다른 누구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운전의 방법을 단번에 깨달을 수 없지만, 삶의 의미란 것은 더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저 언덕 너머'의 무엇이라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이 있다. 육조단경에서부터 비롯된 깨달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지만 한국에서는 성철 스님의 말씀으로 오래된 의문이 증폭되었다.
여전히 해석상의 이견들이 있지만 일반인도 많이 들어 봤을 용어,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이다. 아주 무식하게 줄여서 설명하자면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돈오돈수, 점차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거나 깨달은 이후에도 이를 증대시켜 나아가는 것이 돈오점수이다.
나는 비교종교학에 관심이 많은데, 그 분야를 안다기보다 그러한 접근 방식이 나에게 맞는다는 의미이다. 돈과 점에 대한 의견 중에서 동조하는 견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은 같다. 단번에 대각을 했다(돈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있으므로 이를 점진적으로 벗어나려는 보살행이 필요(점수)하니 어느 하나만 옳다고 할 수 없다."
"대각을 한 뒤 수행이 필요하다면 이는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근처에 갔을 뿐이다."
"대각은 갑자기 오는 것으로 알지만 그 이전에 꾸준한 수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점수가 돈오를 낳는다."
이러한 이견의 꼬리들을 정리한 견해는 성철 스님이 떠난 뒤에 여러 사람들이 발표했는데 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 교수(예수회 신부 베르나르도 스니칼)는 예수와 제자의 삶을 통해 설명했다. "요단강 세례 때 예수의 깨달음이 돈오였을 터이다. 이 체험 이후 죽을 때까지 진리 안에서 남을 위해 살았던 예수는 돈수였다. 그러나 제자들과 신약의 다른 인물들은 스승의 부르심에 돈오했지만 이후 지속적 수행을 필요로 했다는 면에서 점수라 볼 수 있다."며 "성철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에 기초하여 돈오돈수를 알리고자 했고, 보조 스님은 일반 중생의 입장에서 돈오점수를 전하고자 했다고 해석한다."고 성철 스님을 추모했다.
4.
운전에는 단번에 깨닫는 돈오가 없지만 삶에는 돈오가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 점수가 필요할 것이다. 달리 점수를 말하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찰'은 시도할 수 있을 터이고 종교인이라면 '기도'나 '예불', '예배', 그리고 다른 이와 함께 살아 가는 삶을 통해서 돈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깨달음에 근거하여 흔들림 없이(그리고 본질적 가치의 의미에서) 돈오를 설파한 성철 스님과 달리 나같은 범인은 완전한 대각을 이루기가 요원하다. 불교의 용어처럼 '견성'이나 '한 소식'을 듣는 경험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이후 완전한 이타행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는 확약이 아니므로 결국 돈오점수에 더 현실성을 두게 한다. 오죽하면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는 '아라한'조차 '오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는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항상 점수해야 하지 않을까?
5.
종교인이라는 공인된 절차를 밟은 이들이 한국에 많이 있다. 수계가 됐든 세례가 됐든 그 이후로 수 십년 기도를 한 사람들이 허다하다.
그런데 과문해서인지 나는 돈오한 사람(나를 포함해서)을 보지 못했다. 깨달음의 결과는 돈오돈수이며 부활이라 생각된다. 이전의 것과 완전히 결별하고 자기가 깨달은 바 대로 완전히 새로운 선택들만 하는 삶이 돈오돈수이며 부활이다. 그런데 그러자고 종교의 삶을 선택한 이들 중에 '점수'보다 못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다. 어느 정도 많은가를 개인적 경험으로 본다면 압도적이라 할 만 하다. 껍데기는 종교적 삶(아주 단순하게 선한 삶이라고 치자)을 선택한 자라고 하면서 속알맹이는 그저 제 성격대로 가는 것이다.
욕쟁이는 신자생활 10년에도 욕을 하고 사기꾼은 또 사기를 친다. 기도하러 가면서 옆 차랑 삿대질하고 인류를 위해 기도하면서 윗 층과 소음 송사를 벌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각이며 부활이며 이타행을 떠들기보다 아주 소극적이지만 '유연함'을 기억하는 것도 좋다. 적어도 '무사고 10년이니 이젠 달려도 되'라거나 '내 나이 50인데 젊은 것들이 어딜?'이라는 단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돈오할 가능성이 있다. '내가 항상 옳다'는 것은 대각한 사람이 할 말이지 점수하고 있거나 점수할 맘조차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옳은 것이 옳은 것이지 내가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성찰하는 사람은 아직 돈오할 가능성이 있다.
2007. 2. 5.
오랜 신앙생활을 자랑하던 이가 오랜 버릇대로 패악한 것을 보고-
성찰을 술로 하는 주 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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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阿羅漢/arhat /(팔)arahant /'고귀한 사람'이라는 뜻.
불교에서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말하며 보통 부처님의 제자들을 말한다.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生)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불생(不生)이라고 한다.
동의어 '나한'은 산스크리트 'Arhan'을 음역한 아라한을 줄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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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7/02/05 00:42 | 사적만담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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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돈오돈수는 앞으로도 쭈욱...뚜버기로 살아가게 될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