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6월 29일
일본의 [고추잠자리]
6.25라는 한국전쟁은 동족간 살상이 자행된 열강의 바둑판과 같았다. 초기에는 무슨 이념이라도 갖고 방아쇠를 당겼겠지만 전쟁이란 것이 늘 그렇듯이 첫 방아쇠 이후에는 그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기 때문에 전쟁을 한다. 물론 개인에게 전쟁이란 용어보다 그저 전투행위가 와닿는다. 이것이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는 증오, 그로 인한 복수의 행위로 확대되고 인간은 비인간화된다. 개인 간의 분쟁처럼 전쟁 또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최근 중국이 바라본 6.25의 시각으로 책이 출간되었다. 이름도 [항미원조-중국인민지원군]이다.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한 인민의 군대라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니 우리가 바라본 시각의 대척점에 있는 책이다. 그 책의 몇 이미지가 공개됐는데 인민군을 환대하고 돕는 한국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밭갈이나 집짓기를 도와주는 인민군, 미군 포로의 사진 등이 그것이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봤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물론 시위 현장의 보도 사진도 전경의 뒤에서 찍는 것과 시위대의 뒤에서 찍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듯 이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만큼 시각이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완전한 대척점의 위치를 가능하게 한다.
일본의 황궁이나 신사를 거닐다 보면 옆 사진처럼 '소년 영웅의 동상'이란 것이 보인다. 일본의 잔학성을 상징하는 카미가제 조종사인 어린 소년의 동상을 조종복 입은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이 동상은 일본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다가오며 그것은 조종사가 아니라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당연한 시각이다. 그런데 '고추잠자리' 이야기는 그 반대의 시각을 가진 이들을 알게 한다. 카미가제 조종사로 선정되면 이륙 전에 천황이 하사한 정종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딱 공격 거리만 비행할 수 있는 연료를 탑재하고 돌아오지 못할 비행을 시작한다.
당시의 비행기종은 신사에 전시된 '제로센'이었는데 이것이 한 대도 아니고 줄줄이 이륙하는 모습이 흡사 고추잠자리로 보여 어느 일본인이 노래로 부른 것이 '고추잠자리'이다. 전쟁 상대방에게 이 고추잠자리는 잔혹한 짓거리였지만 조종사와 그 가족은 표현 못할 슬픔일 뿐이다. 이륙할 때 겉으로는 '반자이'를 외쳐야 했겠지만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연인으로서 이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한다. 물론 그들의 개인적 슬픔이 일본의 침략과 잔혹한 전쟁의 원죄를 조금이라도 감해주지 못한다. 그건 그들의 슬픔이고 우리에겐 '그럴 짓을 왜 했냐?'는 시각이 당연하다. 원폭 투하가 우리에게 해방의 서곡이었지만 일본에는 패망의 신호탄이었듯이 동일한 사안을 두고 입장에 따라 다른 시각을 보이는 것은 세상의 일상사이다.
위에 언급한 중국의 시각이나 고추잠자리의 슬픔이야 그들의 눈이고 우리의 눈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세상사에서 시각의 차이는 자주 발생하는데 일상적인 말다툼도 사실 시각차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 때때로, 아니 늘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과 다른 시각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억지 부리기와 다른 시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면 그냥 같이 억지부리는 수준으로 살면 된다. 자신이 억지가 아니라면 상대도 억지가 아닐 수 있고 그렇다면 그 다른 시각의 배경을 고려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종교적인, 혹은 인간적인 '사랑'의 한 '방법'이다.
2005. 6. 29.
주 모씨.
최근 중국이 바라본 6.25의 시각으로 책이 출간되었다. 이름도 [항미원조-중국인민지원군]이다.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한 인민의 군대라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니 우리가 바라본 시각의 대척점에 있는 책이다. 그 책의 몇 이미지가 공개됐는데 인민군을 환대하고 돕는 한국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밭갈이나 집짓기를 도와주는 인민군, 미군 포로의 사진 등이 그것이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과 언론을 통해서 봤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물론 시위 현장의 보도 사진도 전경의 뒤에서 찍는 것과 시위대의 뒤에서 찍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이듯 이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만큼 시각이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완전한 대척점의 위치를 가능하게 한다.
일본의 황궁이나 신사를 거닐다 보면 옆 사진처럼 '소년 영웅의 동상'이란 것이 보인다. 일본의 잔학성을 상징하는 카미가제 조종사인 어린 소년의 동상을 조종복 입은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이 동상은 일본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다가오며 그것은 조종사가 아니라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당연한 시각이다. 그런데 '고추잠자리' 이야기는 그 반대의 시각을 가진 이들을 알게 한다. 카미가제 조종사로 선정되면 이륙 전에 천황이 하사한 정종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딱 공격 거리만 비행할 수 있는 연료를 탑재하고 돌아오지 못할 비행을 시작한다.
당시의 비행기종은 신사에 전시된 '제로센'이었는데 이것이 한 대도 아니고 줄줄이 이륙하는 모습이 흡사 고추잠자리로 보여 어느 일본인이 노래로 부른 것이 '고추잠자리'이다. 전쟁 상대방에게 이 고추잠자리는 잔혹한 짓거리였지만 조종사와 그 가족은 표현 못할 슬픔일 뿐이다. 이륙할 때 겉으로는 '반자이'를 외쳐야 했겠지만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연인으로서 이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한다. 물론 그들의 개인적 슬픔이 일본의 침략과 잔혹한 전쟁의 원죄를 조금이라도 감해주지 못한다. 그건 그들의 슬픔이고 우리에겐 '그럴 짓을 왜 했냐?'는 시각이 당연하다. 원폭 투하가 우리에게 해방의 서곡이었지만 일본에는 패망의 신호탄이었듯이 동일한 사안을 두고 입장에 따라 다른 시각을 보이는 것은 세상의 일상사이다.위에 언급한 중국의 시각이나 고추잠자리의 슬픔이야 그들의 눈이고 우리의 눈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세상사에서 시각의 차이는 자주 발생하는데 일상적인 말다툼도 사실 시각차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 때때로, 아니 늘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과 다른 시각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억지 부리기와 다른 시각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면 그냥 같이 억지부리는 수준으로 살면 된다. 자신이 억지가 아니라면 상대도 억지가 아닐 수 있고 그렇다면 그 다른 시각의 배경을 고려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종교적인, 혹은 인간적인 '사랑'의 한 '방법'이다.
2005. 6. 29.
주 모씨.
# by | 2005/06/29 17:29 | 만화말고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