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6월 01일
만화계 10년엔 강산도 안 변한다.
만화평론가 김이랑 씨가 10년 전, 만화판을 향해 날린(?) 글을 다시 봤다. 그 때와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 글은 월간 [길](1994년 10월 호)에 게재됐던 것으로 2004년에 대입해 본다면 몇 몇의 대상이 바뀌고 몇 몇의 수치가 달라졌을 뿐이다.
아래의 글을 2004년에 기고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일독해 보시길.
그 차이의 '미발견'을 발견하시길.
[한국 만화가들에게 고함]
김 이 랑
물론 한국만화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모두 만화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한탕주의"에 눈멀어 일본만화를 무차별적으로 불법복제한 일부 비양심적인 출판사들, 한국만화의 육성보다는 일본만화의 수입에 더 앞장선 일부 만화잡지사들, 불법유통되는 일본만화를 수수방관한 정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일본만화의 자극적인 재미에 빠져 한국만화를 외면한 일부 독자들, 결국 우리 모두 의 책임이다.
1. 이 땅의 만화가들은 죽었는가
87년 출판자유화 조치로 이 땅에 재상륙한 일본만화가 단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만화시장의 70%를 잠식할 때까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드래곤볼] [슬램덩크] [닥터슬럼프] [시티헌터] [북두신권] [란마1/ 2] 등의 일본만화가 한국만화를 제치고 동심에 깊이 뿌리내릴 때까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일본만화에 벼랑 끝 위기로 몰리고 있는 만화를 살리기 위해 과연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물론 한국만화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모두 만화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한탕주의"에 눈멀어 일본만화를 무차별적으로 불법복제한 일부 비양심적인 출판사들, 한국만화의 육성보다는 일본만화의 수입에 더 앞장선 일부 만화잡지사들, 불법유통되는 일본만화를 수수방관한 정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일본만화의 자극적인 재미에 빠져 한국만화를 외면한 일부 독자들, 결국 우리 모두 의 책임이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일본만화보다 더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을 제공하지 못한 한국만화가들에게 그 1차적인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하는 인기작가들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묻고 싶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한국만화가들이 그동안 일본만화의 침투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형식적이긴 해도 매년 한차례씩 만화심포지엄이나 만화발전 세미나를 개최해온 것이 사실이다. 90년 만화심포지엄 "만화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91년 만화심포지엄 "일본만화 수입 이대로 좋은가". 92년 만화발전 세미나 "한국만화 무엇이 문제인가" 93년 만화발전 세미나 "한국만화의 살길은 무엇인가" 등. 또한 지난 92년 , 93년간 각각 한차례씩 불법외국만화 퇴치결의대회를 열기도 했고 일본만화 불법복제 출판사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만 해도 매년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을 뿐 만화가들 스스로가 한국만화를 살리기 위한 진정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말로만 우리 만화를 살리자고 외쳤을 뿐 만화가들 스스로가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정의 실천이라든가 좋은 만화를 그리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만화의 앞날을 걱정하는 만화가들의 순수한 목소리마저 밖에서 보기엔 제 밥그릇 챙기기 주장으로 비쳤는지 모른다.
2. 1년만에 4백권을 그린 만화가도 있어
그렇다면 한국만화가들이 그동안 작품으로나마 승부를 걸어왔는가? 만화가는 말보다는 만화로 얘기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의 인기만화가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마디로 낙제점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함부로 낙제점이라 단정짓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작년도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약칭 간윤)의 작가별 심의 현황을 살펴보자. 간윤이 발표한 [93년도 연차 심의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한해 간윤에 심의를 신청한 만화가는 92년보다 12명이 증가한 2백 27명이고, 이들이 신청한 작품은 총 6천 9백 49권이었다. 이중 1백권 이상의 심의를 신청한 이른바 다작만화가만 손꼽아도 30명이나 된다. 비율로 따지면 13.2%에 불과한 이들 다작만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의 총 수는 5천 3백 16권으로 전체 심의신청권수의 76.5%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2백권이상을 심의신청한 박봉성, 고행석, 천제황, 이현세, 박원빈, 조명훈 6명은 다작만화가 빅 6로 불린다. 심의 신청권수 1위를 기록한 박봉성은 놀랍게도 무려 4백 45권을 신청했으며 이 뒤를 이어 고행석이 3백 60권, 천제황이 2백 81권, 이현세 가 2백 74권, 박원빈이 2백 40권, 조명훈이 2백 22권을 각각 심의 신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1년이 3백 65일에 불과하므로 박봉성은 하루 평균 1~2권을, 고행석은 거의 매일 1권씩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엄청나게 정력적인 창작활동이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어떻게 1년 동안에 이렇게 많은 만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화가 혼자서 1년에 4백 45권이나 되는 작품을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사람의 만화가가 1년에 4백 45권이나 되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까닭은 소위 "만화공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공장이란 한사람의 만화가가 적게는 10여명, 많게는 1백여 명의 문하생을 고용해 대본, 원화, 밑그림, 인물화, 배경화 등을 따로따로 분업 생산하는 만화제작방식을 말한다. 즉 만화를 물건 찍듯이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인 것이다. 만화공장을 차린 만화가들은 고용하는 문하생에게 맡기고 자기는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버젓이 자기이름으로 출판하는 뻔뻔한 만화가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온 만화를 그 만화가의 작품으로 인정해야 할까? 만화공장 만화로 인해 한국만화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밖으로는 일본만화의 위협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고... 이것이 한국만화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만화공장 만화가 한국만화계에 끼치는 병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만화공장 만화는 한국만화의 전반적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 만화공장을 차린 목적이 훌륭한 작품을 그려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에 얼마나 더 많은 만화를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데 있는 이상 작품의 질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토리에 정성을 들일 필요도 못 느낀다. 그냥 그럴 듯하게 꾸미면 된다. 그림에도 신경쓸 여유가 없다. 대충 봐서 인기작가의 그림과 비슷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만화가 어떻게 한국만화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겠는가?
3. 만화공장 만화가 한국만화 망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만화공장 작가가 간윤의 사전심의를 면제받는 무심의 작가로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할까? 무심의 작가 제도란 간윤이 건전 만화문화 정착의 일환으로 지난 92년 6월 29일부터(그 유명한 만우절 6.29군요^^;) 시행해오고 있는 제도로 심의 통과율이 95%이상인 건전 만화가에 한하여 사전심의를 면제해주는 좋은 제도이다. 현재 무심의 작가는 박봉성과 이재학 2명이다. 이현세도 무심의 작가 대상에 올랐지만 최근 스포츠 신문에 게재했던 만화의 단행본 심의과정에서 수정 통과율이 높아 유보상태라고 한다. 박봉성은 92년 이 제도 의 도입과 함께 맨 먼저 무심의 작가로 선정됐고, 작년 4월 이재학이 추가됐다.
간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1년에 몇 편도 그리지 않는 작가에게까지 동일한 혜택을 줄 수는 없으므로 한 달에 10편 이상 그리는 작가 중에서 무심의 작가를 선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작품의 질보다는 양을 중요시하는 간윤의 이러한 방침이 작년 1위, 7위를 기록한 다작작가에게 무심의 작가의 특혜를 부여하는 역설 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음으로 만화공장 만화는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비인기 만화가들의 설 땅을 없애고 있다. 유명작가들이 대량으로 작품을 쏟아내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인기작가의 만화만을 소화해내기에도 벅차다. 즉 독자들이 비인기 만화가들의 작품에까지 눈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인기작가의 이러한 다작행위는 가뜩이나 독자들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비인기 만화가들의 목을 죄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상당수의 비인기 작가들이 이미 붓을 꺾었고, 전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작가도 꽤 된다. 얼마 안 되는 인기작가의 영광의 그늘에서 대다수의 비인기 작가들이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만화공장 만화의 가장 큰 폐해는 신인들의 만화가 데뷔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만화가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극화(劇畵)작가들은 전통적으로 도제식 수업을 통해 만화계에 첫발을 내디뎌왔다. 즉 유명만화가 밑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만화 수업을 닦은 후 만화가로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하생들에게는 그러한 꿈도 미래도 없다. 극단적으로 "만화그리는 기계"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들의 스승이 1년에 수백 권씩의 만화를 그려내며 한국만화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설 땅은 없다. 비인기 만화가들이야 그래도 만화가로서의 명함이라도 한 번 내밀어봤지만 그들은 아직 꿈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시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겪는 아픔은 두 배, 세 배 더 큰지 모른다. 92년 말 문하생들의 모임이 다작만화가들에 대한 경고문을 만화가 협회로 보내온 적이 있었다. 이 경고문에는 꿈을 잃은 그들의 고통과 위기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만화가의 꿈을 가지고 만화계에 입문한지 5년 내지 10여년 된 고참 문하생들입니다. 우리가 입문할 때 선배님들은 5년 내지 7년만 고생하면 만화가가 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키우라"고 하며 장미빛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단행본 만화계는 뿌리째 흔들리며 피폐화하고 있으며, 대본업소는 속속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 우리의 꿈과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우리들의 등용문과 만화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B, C급 작가들을 위해 현재 당신들의 작품을 대폭 줄여 20종으로, 그런 뒤 다시 2개월 뒤에는 15종으로 줄여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겠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2년이 흐른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 유감스럽게도 한국만화계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유명 작가의 다작 행태도 그대로고(아니 양적으로는 되레 늘었다), 문하생들이 만화가로 데뷔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만화계의 벽은 두텁고도 높다.
4. 인기작가들의 책임과 의무
인기작가의 제 배 불리기식 이기주의 행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작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술 더 떠 아예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작가들 이 늘고 있다. 이현세의 팀매니아에 이어 이재학의 양림, 강촌의 대왕, 김 현의 명단사 등 인기작가의 출판사 창립붐이 일고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작을 하건, 출판사를 차리건 그건 작가 개인의 문제이므로 그 누가 탓할 수 있으랴마는 그들이 이미 한국만화계를 대표하는 공인인 이상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그들에게는 위기의 한국만화를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한국만화를 살리는데 앞장서기는커녕, 제 실속을 차리느라 되레 한국만화를 죽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이른바 한국을 대표한다는 인기작가들까지 알게 모르게 일본만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일본만화로부터 한국만화를 지켜야 할 그들이, 일본만화를 능가하는 한국 고유만화를 창조해 내야할 책임이 있는 그들이 일본만화의 모방이라니... 대표적인 두 예를 살펴보자. 먼저 일본만화를 각색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현세의 [엔젤딕]을 들 수 있다. 이현세가 지난 9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엔젤 딕]의 제 2화 [꿈의 화원]은 히노히데시의 [붉은 꽃]을 각색한 작품이다. 물론 일본만화라고 해도 작품만 훌륭하다면 얼마든지 각색할 수 있는 문제고 또한 작품 서두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는데 웬 트집이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엔젤딕]이 [블루엔젤]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야심작이었고, 또한 발표장소가 만화잡지나 대본소만화가 아닌 일간신문이었음을 고려할 때, 한국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그가 일본만화에서 스토리를 빌려오는 행위는 삼갔어야 했다. 더군다나 작품 자체도 [붉은 꽃]과 [양들의 침묵] 을 적당히 섞은 기대에 못 미치는 3류 수준이었기에 더욱 실망이 컸다. 허영만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더 심각하다. 허영만의 인기작 [슈퍼보드]가 초기에 일본만화 [드래곤 볼]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는 것은 만화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가 [스포츠조선]에 연재했던 [미스터 Q]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미스터 Q]의 주인공 중 한사람인 변태섭의 캐릭터가 일본 주간만화잡지 [모닝]에 연재되고 있는 야마모토 야스히토의 [철인 간마]의 주인공 간마를 쏙 빼박았다. 넓적한 얼굴에 곱슬머리, 짙은 눈썹에 두툼한 입술... 외모는 물론이고 변태적인 성격까지 그대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라! 우연일까? 정말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5. 한국만화 시장의 구조적 모순의 근원 "만화대본소"
지금까지 너무 일방적으로 만화가족만 비난한 것 같다. 결코 만화가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다작만화가들이 판칠 수 있는 만화환경, 즉 왜곡된 국내 만화유통구조에 있다. 국내 만화유통 구조는 크게 서점 유통경로와 만화대본소(속칭 만화가게) 유통경로로 구분되는데 아직까지는 대본소 유통경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만화대본소가 한국 만화시장의 구조적 모순의 근원이다. 만화대본소는 전세계에 통틀어 우리나라밖에 없는 특이한 존재 . 일본에도 만화대본소가 있긴 했지만 서점에 밀려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본소의 가장 큰 특징은 취급하는 만화가 "사서 보는 만화"가 아닌 "빌려보는 만화"라는 점이다. 대본소가 취급하는 만화가 "빌려보는 만화"라는 것은 대본소 시장이 수요자는 많고 공급자는 한정되어 있는 시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급자 시장의 특성상 대본소 시장에서도 만화를 빌려보는 손님보다는 빌려주는 대본소가 만화의 선택권을 쥐게된다. 만화의 선택권을 쥐고 있는 대본소 주인은 당연히 상품성이 높은 인기만화가의 작품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인기작가의 작품은 일단 그 이름만으로 어 느정도 고정독자가 확보된다. 반면에 비인기 작가나 신인의 경우에는 위험부담이 높다. 대본소 주인의 입장에서야 안전한 수익사업을 제쳐두고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대본소 체제하에서는 비인기 작가나 신인들이 발붙이기 힘들다. 또한 대본소만화는 제작비가 별로 들지 않기 때문에 많이 그리고 자주 찍어내면 낼수록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대본소 주인들은 만화가들에게 빨리 그리고 많이 그려줄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작품의 질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 적당히 그려도 독자들이 이해해주고 넘어가니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대본소 이기주의에 한국만화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일본만화로부터 한국만화를 지키고 있는 마지막 보루인 만화대본소가 다작으로 인한 작품의 질적 저하, 다작작가의 부익부 및 비인기 작가/신인의 빈익빈이라는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한국만화병의 근원지라는데 한국만화계의 딜레마가 있다.
6. 정부의 만화정책은 엉망
이제부턴 정부의 잘못을 얘기해보자. 정부의 만화정책은 한마디로 "무정책의 정책"이라 할만하다. 그 단적인 예가 만화에 관한 아무런 공식통계집계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1년에 얼마 만큼의 만화 및 만화잡지가 발간되고 있는지, 한국시장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매년 발표하는 [출판통계]에서도 만화에 대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만화는 통계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화문화상 제도만 해도 그렇다. 만화문화상이란 문화체육부에서 매년 그 해 만화발전에 공로를 세운 작가나 단체에 저작부문, 출판부문, 공로부문으로 나뉘어 시상하는 훌륭한 취지의 제도이다.
지난 91년 도입된 만화문화상의 첫수상의 영광은 저작상 윤승운([겨레의 인걸 100인]), 출판상 동아출판사([만화로 보는 현대 과학의 세계)], 공로상 YWCA만화 모니터 모임이 안았다. 만화왕국이라는 일본에서조차 만화에 대한 문부대신상이 제정된 것이 지난 89년임을 고려할 때 당시 만화 문화상의 제정은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만화문화상 제도가 제 2회 때부터 만화계 내부의 잔치로 의미가 퇴색되더니 마침내는 만화계조차 외면, 문화체육부의 공치사적인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뭘까?
만화문화상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만화계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은 문화체육부의 경직된 행정 때문이다. 먼저 만화문화상의 대상을 아동만화로 한정함으로써 한국만화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극화를 제외한 것이 만화계의 반발을 샀다. 만화문화상이 아동만화상이 아닌 이상 극화를 포함한 모든 한국만화에 공평한 기회를 주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동만화라고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대상이 극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송우출 판사가 만화문화상의 저작상 부문을 3회연속 수상했다는 사실은(1회 윤승운의 겨레의 인걸 100인, 2회 박수동의 공룡나라 우리 엄마, 3회 이정문의 심술북) 한편으론 국내 아동만화 시장의 열악한 환경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만화문화상 시상제도의 편향성을 반증하고 있다.
만화문화상 제도가 만화계의 외면을 받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수상자에 대한 사후지원제도의 부재이다. 만화문화상 제도가 수상자에게 문화체육부 장관상과 상금 1백만 원을 지급하는 형식적 행사로 끝나서는 한국만화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훌륭한 만화를 내놓은 만화가와 출판사에는 그에 합당한 사후지원 조치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정부의 만화정책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 만화심의의 문제이다. 국내 만화심의제도는 매체별로 지나치게 다원화되어 있고 심의의 일관성이 없다. 먼저 만화만 보더라도 단행본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만화잡지는 공보처의 사후심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만화영화와 비디오 그리고 게임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TV 만화영화는 방송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7. 이젠 만화산업 육성해야 할 때
심의문제를 크게 다루면 너무 방대하므로 여기서는 만화영화와 비디오/게임을 제외한 순수 만화심의에 한정해서 얘기하기로 하자. 현재 국내 만화심의 문제와 관련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사전심의 제도의 폐지 및 사후심의제도의 도입이다. 한국만화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기형적인 성장으로 보이고 있는 이유는 한국만화의 발목을 죄고 있는 족쇄, 즉 전근대적인 사전 심의제도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하루바삐 사후심의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만화심의 등급제의 시행이다. 현재 만화에 대한 사전심의 기준은 전부 아동에 맞춰져있다. 즉 아동만화가 아니면 곧 성인만화다. 청소년 만화란 말은 있지만 심의기준상 청소년 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아동/성인만화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만화영화. 비디오처럼 아동만화, 청소년만화, 성인만화 등으로 세분하는 만화 등급제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외국만화에 대한 분명한 심의원칙의 정립이다.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현재 문체부는 외국만화 특히 일본만화에 대한 심의를 허가해놓고도(지난 91년, 현재까지 간윤의 사전심의필증을 받은 일본 만화는 [닥터슬럼프] [베르사이유의 장미] [쿵후 삼국지] 단 3편에 불과하다) 여론의 반대에 밀려 어거지로 일본만화의 심의신청을 받고 있지 않는 상태다. 그러면서도 일본만화의 불법복제는 그대로 방치, 심의받지 않은 일본만화는 아무런 제약없이 유통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이제 일본만화 심의에 대한 문체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때다. 어차피 97년이 되면 좋든 싫든 만화시장을 전면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일본만화 심의는 보류해야 할 것이며, 불법복제 일본만화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일본만화에 대한 심의가 불가피하다면 국내만화 와는 달리 사전심의 제도를 철저히 적용해야 할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만, 올 6월 프랑스의회를 통과한 "프랑스어 사용에 관한 법률"의 예에서 보듯 형평성보다는 대중문화 보호가 우선한다. 만화와 관련된 정부의 움직임 중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문체부내의 문화산업기획과에서 출판/영상/게임/팬시상품과 광고/관광산업까지 연계된 "만화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문체부가 "만화산업"육성을 위해 내놓은 청사진은 대단히 의욕적이다. 우선 내년만 보더라도 만화산업 진흥방안을 위한 심포지엄 개최, 유통구조와 시장현황 등 실태파악을 통한 조사/연구 작업, 영상만화대상 제정, 만화영화 시나리오 공모, 만화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서울만화축제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이 기획되어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화사업기획과에서 올해 신청한 총 예산 12억원의 1/3에 불과한 4억 4천만원의 예산밖에 확보하지 못한 점과 만화산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만화에 대한 지원이 뒷전으로 밀린 점이다. 그러나 여태껏 정부차원에서 만화에 대해 이렇게 의욕적인 사업계획을 제시한 적도 없었고 또한 이렇게 많은 예산을 지원해 준 적도 없었던 만큼 정부의 만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 그 자체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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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04년, 김이랑의 글이 발표된지 10년이 흘렀다. 무엇이 개선되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그대로인 것은 서두에 있는 첫 문장 "심각한 위기 상황"부터 유효하다. 한국만화(출판단행본) 시장의 70%를 잠식한 일본만화, 일본만화 수입에 더 앞장선 일부 만화잡지사들, 불법 유통되는 일본 만화의 문제, 일본만화의 재미에 빠져 한국만화를 외면하는 독자들, 매년 열리는 한 두 차례의 만화 심포지움이나 세미나, 한국만화를 살리기 위한 만화가들의 진정한 노력 결여, 445권의 연간 창작 수치(10년 뒤인 지금은 600권이 넘는다.), 100여명의 만화공장(해외 진출의 쾌거를 이루다!!--;;), 인기작가의 다작 출간, "자유구역"으로 이어진 작가 출판사 설립, 신문 연재만화 "돈줄"(박 모작가가 이 모 작가의 스토리를 받아서 패가망신한 사건)의 일본만화 "돈의 제왕" 베끼기 사건, "빌려 보는 만화" 문제, 여전히 한국만화의 최후 보루(문화적이라기보다는 산업 규모와 만화인력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라는 "대본소" 등등.
달라진 것은 다작작가로 꼽히던 이들이 줄줄이 퇴출된 상황으로 고행석, 천제황, 박원빈, 조명훈은 신간출판시장에서 정리됐다. 사후 심의가 사전 심의로 바뀌긴 했지만 사후 심의 또한 등급제의 문제가 남아 있다. "문하생들의 모임"은 지금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다작 거부"의 경고문은 이제 "밀린 고료나 제대로 달라"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구조적 모순의 대명사가 "대본소"에서 "대여점"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갔다.
그나마 이 글을 기준으로 본다면 개선된 것은 정부 쪽이 가장 많다. 공식 집계에 미흡하지만 기초산업 조사에서 만화산업이 포함되었고 이를 토대로 시장 규모의 수치가 제시되기도 했다. 출판 통계의 만화 통계도 이제 10년치 자료가 누적되어 있고 "만화문화 상"은 국무총리가 시상 주체로 격상되기도 했다. 수상자가 아니지만 우수만화 제작지원제도와 신인작가 잡지연재 지원도 꽤 돈이 나가는 사업이고 수혜자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천억이 넘는 돈을 만화에만 쏟아 넣는 것이 현재의 정부이다. 10년 전에는 4억이었다지 않는가.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데 우리 나라 만화계는 "강산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심한 억지일까? 10년 뒤에도 이런 글이 발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 상황이 되거나 긍정적 상황이 되는 것은 오늘 만화판에 발 담그고 있는 모든 이의 책임이다.
현재의 어려움은 문제를 몰라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문제들을 풀지 못하는 상황이다. 문제에 대한 질책이나 비아냥은 어디 한 두번 나왔나? 지금도 인터넷에서 "한국 만화"와 연관된 검색어를 치면 전문가들이 널려 있다. 문제는 진단 전문가와 질책이 넘쳐나고 대안도 나올 것은 다 나왔는데 결론을 맺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결론은 어찌 맺는가?
오늘 밥그릇을 생각하지 않고 내일 잔치상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의 밥그릇이 무엇인지, 내일의 잔치가 무엇인지 그리 어렵지 않은 비유라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워낙 간단한 해법이라 결론같지도 않다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 간단한 걸 못하는 만화계구나....하고.
2004. 5. 18.
주 모씨
아래의 글을 2004년에 기고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일독해 보시길.
그 차이의 '미발견'을 발견하시길.
[한국 만화가들에게 고함]
김 이 랑
물론 한국만화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모두 만화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한탕주의"에 눈멀어 일본만화를 무차별적으로 불법복제한 일부 비양심적인 출판사들, 한국만화의 육성보다는 일본만화의 수입에 더 앞장선 일부 만화잡지사들, 불법유통되는 일본만화를 수수방관한 정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일본만화의 자극적인 재미에 빠져 한국만화를 외면한 일부 독자들, 결국 우리 모두 의 책임이다.
1. 이 땅의 만화가들은 죽었는가
87년 출판자유화 조치로 이 땅에 재상륙한 일본만화가 단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만화시장의 70%를 잠식할 때까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드래곤볼] [슬램덩크] [닥터슬럼프] [시티헌터] [북두신권] [란마1/ 2] 등의 일본만화가 한국만화를 제치고 동심에 깊이 뿌리내릴 때까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일본만화에 벼랑 끝 위기로 몰리고 있는 만화를 살리기 위해 과연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물론 한국만화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모두 만화가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한탕주의"에 눈멀어 일본만화를 무차별적으로 불법복제한 일부 비양심적인 출판사들, 한국만화의 육성보다는 일본만화의 수입에 더 앞장선 일부 만화잡지사들, 불법유통되는 일본만화를 수수방관한 정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일본만화의 자극적인 재미에 빠져 한국만화를 외면한 일부 독자들, 결국 우리 모두 의 책임이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일본만화보다 더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을 제공하지 못한 한국만화가들에게 그 1차적인 책임이 있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를 대표한다고 하는 인기작가들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묻고 싶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한국만화가들이 그동안 일본만화의 침투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형식적이긴 해도 매년 한차례씩 만화심포지엄이나 만화발전 세미나를 개최해온 것이 사실이다. 90년 만화심포지엄 "만화문화 무엇이 문제인가", "91년 만화심포지엄 "일본만화 수입 이대로 좋은가". 92년 만화발전 세미나 "한국만화 무엇이 문제인가" 93년 만화발전 세미나 "한국만화의 살길은 무엇인가" 등. 또한 지난 92년 , 93년간 각각 한차례씩 불법외국만화 퇴치결의대회를 열기도 했고 일본만화 불법복제 출판사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포지엄이나 세미나만 해도 매년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을 뿐 만화가들 스스로가 한국만화를 살리기 위한 진정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말로만 우리 만화를 살리자고 외쳤을 뿐 만화가들 스스로가 그동안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정의 실천이라든가 좋은 만화를 그리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만화의 앞날을 걱정하는 만화가들의 순수한 목소리마저 밖에서 보기엔 제 밥그릇 챙기기 주장으로 비쳤는지 모른다.
2. 1년만에 4백권을 그린 만화가도 있어
그렇다면 한국만화가들이 그동안 작품으로나마 승부를 걸어왔는가? 만화가는 말보다는 만화로 얘기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의 인기만화가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한마디로 낙제점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함부로 낙제점이라 단정짓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작년도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약칭 간윤)의 작가별 심의 현황을 살펴보자. 간윤이 발표한 [93년도 연차 심의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한해 간윤에 심의를 신청한 만화가는 92년보다 12명이 증가한 2백 27명이고, 이들이 신청한 작품은 총 6천 9백 49권이었다. 이중 1백권 이상의 심의를 신청한 이른바 다작만화가만 손꼽아도 30명이나 된다. 비율로 따지면 13.2%에 불과한 이들 다작만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의 총 수는 5천 3백 16권으로 전체 심의신청권수의 76.5%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2백권이상을 심의신청한 박봉성, 고행석, 천제황, 이현세, 박원빈, 조명훈 6명은 다작만화가 빅 6로 불린다. 심의 신청권수 1위를 기록한 박봉성은 놀랍게도 무려 4백 45권을 신청했으며 이 뒤를 이어 고행석이 3백 60권, 천제황이 2백 81권, 이현세 가 2백 74권, 박원빈이 2백 40권, 조명훈이 2백 22권을 각각 심의 신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1년이 3백 65일에 불과하므로 박봉성은 하루 평균 1~2권을, 고행석은 거의 매일 1권씩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엄청나게 정력적인 창작활동이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어떻게 1년 동안에 이렇게 많은 만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화가 혼자서 1년에 4백 45권이나 되는 작품을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사람의 만화가가 1년에 4백 45권이나 되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까닭은 소위 "만화공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공장이란 한사람의 만화가가 적게는 10여명, 많게는 1백여 명의 문하생을 고용해 대본, 원화, 밑그림, 인물화, 배경화 등을 따로따로 분업 생산하는 만화제작방식을 말한다. 즉 만화를 물건 찍듯이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인 것이다. 만화공장을 차린 만화가들은 고용하는 문하생에게 맡기고 자기는 한번도 손대지 않은 채 버젓이 자기이름으로 출판하는 뻔뻔한 만화가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온 만화를 그 만화가의 작품으로 인정해야 할까? 만화공장 만화로 인해 한국만화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밖으로는 일본만화의 위협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하고... 이것이 한국만화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만화공장 만화가 한국만화계에 끼치는 병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만화공장 만화는 한국만화의 전반적 질적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 만화공장을 차린 목적이 훌륭한 작품을 그려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에 얼마나 더 많은 만화를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데 있는 이상 작품의 질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토리에 정성을 들일 필요도 못 느낀다. 그냥 그럴 듯하게 꾸미면 된다. 그림에도 신경쓸 여유가 없다. 대충 봐서 인기작가의 그림과 비슷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만화가 어떻게 한국만화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겠는가?
3. 만화공장 만화가 한국만화 망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만화공장 작가가 간윤의 사전심의를 면제받는 무심의 작가로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할까? 무심의 작가 제도란 간윤이 건전 만화문화 정착의 일환으로 지난 92년 6월 29일부터(그 유명한 만우절 6.29군요^^;) 시행해오고 있는 제도로 심의 통과율이 95%이상인 건전 만화가에 한하여 사전심의를 면제해주는 좋은 제도이다. 현재 무심의 작가는 박봉성과 이재학 2명이다. 이현세도 무심의 작가 대상에 올랐지만 최근 스포츠 신문에 게재했던 만화의 단행본 심의과정에서 수정 통과율이 높아 유보상태라고 한다. 박봉성은 92년 이 제도 의 도입과 함께 맨 먼저 무심의 작가로 선정됐고, 작년 4월 이재학이 추가됐다.
간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1년에 몇 편도 그리지 않는 작가에게까지 동일한 혜택을 줄 수는 없으므로 한 달에 10편 이상 그리는 작가 중에서 무심의 작가를 선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작품의 질보다는 양을 중요시하는 간윤의 이러한 방침이 작년 1위, 7위를 기록한 다작작가에게 무심의 작가의 특혜를 부여하는 역설 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음으로 만화공장 만화는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비인기 만화가들의 설 땅을 없애고 있다. 유명작가들이 대량으로 작품을 쏟아내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인기작가의 만화만을 소화해내기에도 벅차다. 즉 독자들이 비인기 만화가들의 작품에까지 눈 돌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인기작가의 이러한 다작행위는 가뜩이나 독자들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비인기 만화가들의 목을 죄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상당수의 비인기 작가들이 이미 붓을 꺾었고, 전업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작가도 꽤 된다. 얼마 안 되는 인기작가의 영광의 그늘에서 대다수의 비인기 작가들이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만화공장 만화의 가장 큰 폐해는 신인들의 만화가 데뷔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만화가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극화(劇畵)작가들은 전통적으로 도제식 수업을 통해 만화계에 첫발을 내디뎌왔다. 즉 유명만화가 밑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만화 수업을 닦은 후 만화가로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하생들에게는 그러한 꿈도 미래도 없다. 극단적으로 "만화그리는 기계"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들의 스승이 1년에 수백 권씩의 만화를 그려내며 한국만화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는 이상 그들이 설 땅은 없다. 비인기 만화가들이야 그래도 만화가로서의 명함이라도 한 번 내밀어봤지만 그들은 아직 꿈 한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시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겪는 아픔은 두 배, 세 배 더 큰지 모른다. 92년 말 문하생들의 모임이 다작만화가들에 대한 경고문을 만화가 협회로 보내온 적이 있었다. 이 경고문에는 꿈을 잃은 그들의 고통과 위기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만화가의 꿈을 가지고 만화계에 입문한지 5년 내지 10여년 된 고참 문하생들입니다. 우리가 입문할 때 선배님들은 5년 내지 7년만 고생하면 만화가가 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키우라"고 하며 장미빛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단행본 만화계는 뿌리째 흔들리며 피폐화하고 있으며, 대본업소는 속속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 우리의 꿈과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우리들의 등용문과 만화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B, C급 작가들을 위해 현재 당신들의 작품을 대폭 줄여 20종으로, 그런 뒤 다시 2개월 뒤에는 15종으로 줄여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겠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2년이 흐른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 유감스럽게도 한국만화계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유명 작가의 다작 행태도 그대로고(아니 양적으로는 되레 늘었다), 문하생들이 만화가로 데뷔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만화계의 벽은 두텁고도 높다.
4. 인기작가들의 책임과 의무
인기작가의 제 배 불리기식 이기주의 행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작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술 더 떠 아예 직접 출판사를 차리는 작가들 이 늘고 있다. 이현세의 팀매니아에 이어 이재학의 양림, 강촌의 대왕, 김 현의 명단사 등 인기작가의 출판사 창립붐이 일고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작을 하건, 출판사를 차리건 그건 작가 개인의 문제이므로 그 누가 탓할 수 있으랴마는 그들이 이미 한국만화계를 대표하는 공인인 이상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그들에게는 위기의 한국만화를 살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한국만화를 살리는데 앞장서기는커녕, 제 실속을 차리느라 되레 한국만화를 죽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이른바 한국을 대표한다는 인기작가들까지 알게 모르게 일본만화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일본만화로부터 한국만화를 지켜야 할 그들이, 일본만화를 능가하는 한국 고유만화를 창조해 내야할 책임이 있는 그들이 일본만화의 모방이라니... 대표적인 두 예를 살펴보자. 먼저 일본만화를 각색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현세의 [엔젤딕]을 들 수 있다. 이현세가 지난 9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엔젤 딕]의 제 2화 [꿈의 화원]은 히노히데시의 [붉은 꽃]을 각색한 작품이다. 물론 일본만화라고 해도 작품만 훌륭하다면 얼마든지 각색할 수 있는 문제고 또한 작품 서두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혔는데 웬 트집이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엔젤딕]이 [블루엔젤]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야심작이었고, 또한 발표장소가 만화잡지나 대본소만화가 아닌 일간신문이었음을 고려할 때, 한국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그가 일본만화에서 스토리를 빌려오는 행위는 삼갔어야 했다. 더군다나 작품 자체도 [붉은 꽃]과 [양들의 침묵] 을 적당히 섞은 기대에 못 미치는 3류 수준이었기에 더욱 실망이 컸다. 허영만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더 심각하다. 허영만의 인기작 [슈퍼보드]가 초기에 일본만화 [드래곤 볼]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는 것은 만화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가 [스포츠조선]에 연재했던 [미스터 Q]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미스터 Q]의 주인공 중 한사람인 변태섭의 캐릭터가 일본 주간만화잡지 [모닝]에 연재되고 있는 야마모토 야스히토의 [철인 간마]의 주인공 간마를 쏙 빼박았다. 넓적한 얼굴에 곱슬머리, 짙은 눈썹에 두툼한 입술... 외모는 물론이고 변태적인 성격까지 그대로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라! 우연일까? 정말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5. 한국만화 시장의 구조적 모순의 근원 "만화대본소"
지금까지 너무 일방적으로 만화가족만 비난한 것 같다. 결코 만화가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다작만화가들이 판칠 수 있는 만화환경, 즉 왜곡된 국내 만화유통구조에 있다. 국내 만화유통 구조는 크게 서점 유통경로와 만화대본소(속칭 만화가게) 유통경로로 구분되는데 아직까지는 대본소 유통경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만화대본소가 한국 만화시장의 구조적 모순의 근원이다. 만화대본소는 전세계에 통틀어 우리나라밖에 없는 특이한 존재 . 일본에도 만화대본소가 있긴 했지만 서점에 밀려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본소의 가장 큰 특징은 취급하는 만화가 "사서 보는 만화"가 아닌 "빌려보는 만화"라는 점이다. 대본소가 취급하는 만화가 "빌려보는 만화"라는 것은 대본소 시장이 수요자는 많고 공급자는 한정되어 있는 시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급자 시장의 특성상 대본소 시장에서도 만화를 빌려보는 손님보다는 빌려주는 대본소가 만화의 선택권을 쥐게된다. 만화의 선택권을 쥐고 있는 대본소 주인은 당연히 상품성이 높은 인기만화가의 작품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인기작가의 작품은 일단 그 이름만으로 어 느정도 고정독자가 확보된다. 반면에 비인기 작가나 신인의 경우에는 위험부담이 높다. 대본소 주인의 입장에서야 안전한 수익사업을 제쳐두고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러한 대본소 체제하에서는 비인기 작가나 신인들이 발붙이기 힘들다. 또한 대본소만화는 제작비가 별로 들지 않기 때문에 많이 그리고 자주 찍어내면 낼수록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대본소 주인들은 만화가들에게 빨리 그리고 많이 그려줄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작품의 질 같은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 적당히 그려도 독자들이 이해해주고 넘어가니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대본소 이기주의에 한국만화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일본만화로부터 한국만화를 지키고 있는 마지막 보루인 만화대본소가 다작으로 인한 작품의 질적 저하, 다작작가의 부익부 및 비인기 작가/신인의 빈익빈이라는 빈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한국만화병의 근원지라는데 한국만화계의 딜레마가 있다.
6. 정부의 만화정책은 엉망
이제부턴 정부의 잘못을 얘기해보자. 정부의 만화정책은 한마디로 "무정책의 정책"이라 할만하다. 그 단적인 예가 만화에 관한 아무런 공식통계집계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1년에 얼마 만큼의 만화 및 만화잡지가 발간되고 있는지, 한국시장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겠는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매년 발표하는 [출판통계]에서도 만화에 대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만화는 통계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화문화상 제도만 해도 그렇다. 만화문화상이란 문화체육부에서 매년 그 해 만화발전에 공로를 세운 작가나 단체에 저작부문, 출판부문, 공로부문으로 나뉘어 시상하는 훌륭한 취지의 제도이다.
지난 91년 도입된 만화문화상의 첫수상의 영광은 저작상 윤승운([겨레의 인걸 100인]), 출판상 동아출판사([만화로 보는 현대 과학의 세계)], 공로상 YWCA만화 모니터 모임이 안았다. 만화왕국이라는 일본에서조차 만화에 대한 문부대신상이 제정된 것이 지난 89년임을 고려할 때 당시 만화 문화상의 제정은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만화문화상 제도가 제 2회 때부터 만화계 내부의 잔치로 의미가 퇴색되더니 마침내는 만화계조차 외면, 문화체육부의 공치사적인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가 뭘까?
만화문화상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만화계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은 문화체육부의 경직된 행정 때문이다. 먼저 만화문화상의 대상을 아동만화로 한정함으로써 한국만화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극화를 제외한 것이 만화계의 반발을 샀다. 만화문화상이 아동만화상이 아닌 이상 극화를 포함한 모든 한국만화에 공평한 기회를 주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동만화라고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대상이 극도로 축소되고 말았다. 송우출 판사가 만화문화상의 저작상 부문을 3회연속 수상했다는 사실은(1회 윤승운의 겨레의 인걸 100인, 2회 박수동의 공룡나라 우리 엄마, 3회 이정문의 심술북) 한편으론 국내 아동만화 시장의 열악한 환경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만화문화상 시상제도의 편향성을 반증하고 있다.
만화문화상 제도가 만화계의 외면을 받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수상자에 대한 사후지원제도의 부재이다. 만화문화상 제도가 수상자에게 문화체육부 장관상과 상금 1백만 원을 지급하는 형식적 행사로 끝나서는 한국만화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훌륭한 만화를 내놓은 만화가와 출판사에는 그에 합당한 사후지원 조치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정부의 만화정책과 관련해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 만화심의의 문제이다. 국내 만화심의제도는 매체별로 지나치게 다원화되어 있고 심의의 일관성이 없다. 먼저 만화만 보더라도 단행본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만화잡지는 공보처의 사후심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만화영화와 비디오 그리고 게임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TV 만화영화는 방송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7. 이젠 만화산업 육성해야 할 때
심의문제를 크게 다루면 너무 방대하므로 여기서는 만화영화와 비디오/게임을 제외한 순수 만화심의에 한정해서 얘기하기로 하자. 현재 국내 만화심의 문제와 관련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사전심의 제도의 폐지 및 사후심의제도의 도입이다. 한국만화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기형적인 성장으로 보이고 있는 이유는 한국만화의 발목을 죄고 있는 족쇄, 즉 전근대적인 사전 심의제도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하루바삐 사후심의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만화심의 등급제의 시행이다. 현재 만화에 대한 사전심의 기준은 전부 아동에 맞춰져있다. 즉 아동만화가 아니면 곧 성인만화다. 청소년 만화란 말은 있지만 심의기준상 청소년 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아동/성인만화의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만화영화. 비디오처럼 아동만화, 청소년만화, 성인만화 등으로 세분하는 만화 등급제를 시행해야 할 것이다.
외국만화에 대한 분명한 심의원칙의 정립이다. 이 부분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현재 문체부는 외국만화 특히 일본만화에 대한 심의를 허가해놓고도(지난 91년, 현재까지 간윤의 사전심의필증을 받은 일본 만화는 [닥터슬럼프] [베르사이유의 장미] [쿵후 삼국지] 단 3편에 불과하다) 여론의 반대에 밀려 어거지로 일본만화의 심의신청을 받고 있지 않는 상태다. 그러면서도 일본만화의 불법복제는 그대로 방치, 심의받지 않은 일본만화는 아무런 제약없이 유통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이제 일본만화 심의에 대한 문체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때다. 어차피 97년이 되면 좋든 싫든 만화시장을 전면개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일본만화 심의는 보류해야 할 것이며, 불법복제 일본만화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일본만화에 대한 심의가 불가피하다면 국내만화 와는 달리 사전심의 제도를 철저히 적용해야 할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겠지만, 올 6월 프랑스의회를 통과한 "프랑스어 사용에 관한 법률"의 예에서 보듯 형평성보다는 대중문화 보호가 우선한다. 만화와 관련된 정부의 움직임 중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문체부내의 문화산업기획과에서 출판/영상/게임/팬시상품과 광고/관광산업까지 연계된 "만화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문체부가 "만화산업"육성을 위해 내놓은 청사진은 대단히 의욕적이다. 우선 내년만 보더라도 만화산업 진흥방안을 위한 심포지엄 개최, 유통구조와 시장현황 등 실태파악을 통한 조사/연구 작업, 영상만화대상 제정, 만화영화 시나리오 공모, 만화게임 소프트웨어 개발, 서울만화축제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이 기획되어 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화사업기획과에서 올해 신청한 총 예산 12억원의 1/3에 불과한 4억 4천만원의 예산밖에 확보하지 못한 점과 만화산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만화에 대한 지원이 뒷전으로 밀린 점이다. 그러나 여태껏 정부차원에서 만화에 대해 이렇게 의욕적인 사업계획을 제시한 적도 없었고 또한 이렇게 많은 예산을 지원해 준 적도 없었던 만큼 정부의 만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 그 자체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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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04년, 김이랑의 글이 발표된지 10년이 흘렀다. 무엇이 개선되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그대로인 것은 서두에 있는 첫 문장 "심각한 위기 상황"부터 유효하다. 한국만화(출판단행본) 시장의 70%를 잠식한 일본만화, 일본만화 수입에 더 앞장선 일부 만화잡지사들, 불법 유통되는 일본 만화의 문제, 일본만화의 재미에 빠져 한국만화를 외면하는 독자들, 매년 열리는 한 두 차례의 만화 심포지움이나 세미나, 한국만화를 살리기 위한 만화가들의 진정한 노력 결여, 445권의 연간 창작 수치(10년 뒤인 지금은 600권이 넘는다.), 100여명의 만화공장(해외 진출의 쾌거를 이루다!!--;;), 인기작가의 다작 출간, "자유구역"으로 이어진 작가 출판사 설립, 신문 연재만화 "돈줄"(박 모작가가 이 모 작가의 스토리를 받아서 패가망신한 사건)의 일본만화 "돈의 제왕" 베끼기 사건, "빌려 보는 만화" 문제, 여전히 한국만화의 최후 보루(문화적이라기보다는 산업 규모와 만화인력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라는 "대본소" 등등.
달라진 것은 다작작가로 꼽히던 이들이 줄줄이 퇴출된 상황으로 고행석, 천제황, 박원빈, 조명훈은 신간출판시장에서 정리됐다. 사후 심의가 사전 심의로 바뀌긴 했지만 사후 심의 또한 등급제의 문제가 남아 있다. "문하생들의 모임"은 지금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다작 거부"의 경고문은 이제 "밀린 고료나 제대로 달라"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구조적 모순의 대명사가 "대본소"에서 "대여점"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갔다.
그나마 이 글을 기준으로 본다면 개선된 것은 정부 쪽이 가장 많다. 공식 집계에 미흡하지만 기초산업 조사에서 만화산업이 포함되었고 이를 토대로 시장 규모의 수치가 제시되기도 했다. 출판 통계의 만화 통계도 이제 10년치 자료가 누적되어 있고 "만화문화 상"은 국무총리가 시상 주체로 격상되기도 했다. 수상자가 아니지만 우수만화 제작지원제도와 신인작가 잡지연재 지원도 꽤 돈이 나가는 사업이고 수혜자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천억이 넘는 돈을 만화에만 쏟아 넣는 것이 현재의 정부이다. 10년 전에는 4억이었다지 않는가.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데 우리 나라 만화계는 "강산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심한 억지일까? 10년 뒤에도 이런 글이 발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 상황이 되거나 긍정적 상황이 되는 것은 오늘 만화판에 발 담그고 있는 모든 이의 책임이다.
현재의 어려움은 문제를 몰라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문제들을 풀지 못하는 상황이다. 문제에 대한 질책이나 비아냥은 어디 한 두번 나왔나? 지금도 인터넷에서 "한국 만화"와 연관된 검색어를 치면 전문가들이 널려 있다. 문제는 진단 전문가와 질책이 넘쳐나고 대안도 나올 것은 다 나왔는데 결론을 맺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결론은 어찌 맺는가?
오늘 밥그릇을 생각하지 않고 내일 잔치상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의 밥그릇이 무엇인지, 내일의 잔치가 무엇인지 그리 어렵지 않은 비유라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워낙 간단한 해법이라 결론같지도 않다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 간단한 걸 못하는 만화계구나....하고.
2004. 5. 18.
주 모씨
# by | 2005/06/01 02:26 | 딴지 거는 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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