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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점이 어딘데?

만화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의 일상은 대부분의 문명 국가에서 흔한 상황이다. 그 만화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만화는 무엇을 주는지 많은 논의와 主義, 主張이 있었고 사회학적 실험도 있었다. 일반적인 결론은 만화를 봄으로 인해서 아이들에게 우정이 무엇인지, 희망이 무엇인지, 협동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하고 그런 인성을 갖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나쁜 넘은 언제나 그 실체가 드러나고 현세에서 벌을 받는 다는 勸善懲惡이다. 착한 아이가 과정에서 고난을 받기는 하지만 이것은 결과를 아는 가시밭길로 오히려 착한 아이의 행복을 배가시키기고 수용자의 감동을 증폭시키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서의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아이들이 만화 키드의 울타리에서 세상의 도시로 나왔을 때의 乖離感이다. 세상은 만화의 서사 구조가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 '도그 테이블(dog table)'이다. 우정만으로 뭉쳐진 또래도 아니고 협동의 결과가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있지만 여건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고방식-팔다리가 다 떨어져 나간 사고에서도 그나마 살아서 다행이라는 위로가 가능케 하는 사고방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결정적으로 착한 아이가 해피엔딩을 항상 맞이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백마 탄 왕자는 도로교통법에 저촉되어 잡혀갔는지 오지도 않고 구원의 천사는 대기오염으로 질식사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위험한 순간에 나오는 요술 지팡이는 아무리 휘둘러도 팔만 아플 뿐, 무지개는 뿌려지지 않는다.

만화와 삶은 다르다. 만화에서 그려지는 복선이나 예정된 반전, 그리고 해피 엔딩을 강화하는 장치로서의 갈등 구조도 우리의 삶에서는 대부분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런 예측이나 조짐 없이 맞닥트리는 불행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만화에서야 누구와 누구가 만나면 '아, 둘이서 사랑하겠구나'라며 예상이 가능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무질서하게 찾아든다. 이미 스쳐간 누군가가 그일 수도 있고 지금의 그가 아닐 수도 있다. 자동차 사고 역시 급작스럽게 다가오고 빌딩의 붕괴도 마찬가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꼭 이런 의미는 아니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암묵적인 희망을 전제로 권유하는 말이다. 만화에서야 그렇게 그려지는 게 당연하고 필요하지만 현실에선 정말 죽도록 고생하다가 그냥 죽는 경우도 있고 고생 끝에 인생 끝나는 경우도 있다.
해피엔딩을 위한 갈등 장치가 현실에서는 개인의 삶을 지속적으로 비틀다가 인간관계를 바닥에 팽겨치게 하고 그 끝에 원수로 남게 하는 일도 非一非再하다. 갈등이 해결되면 지구상에서 하루도 끊이지 않고 진행되는 지역 분쟁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만화에서 계속 불행만 있는 삶이 그려지거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파국도 없이 치닫거나 고생 끝에 그냥 픽 끝나 버린다면 이건 정말 스토리 부재의 졸작이라고 혹평, 아니 작품으로 만들어지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허접한 스토리, 혹은 시작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茶飯事이다. 만화는 연재 범위가 있지만 삶에는 終局이 언제인지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삶의 궤적은 단 한줄기의 선으로 이어질 뿐이다. 여러 갈래의 선은 커녕 두 갈래조차 허용되지 않는 흔적으로 남을 뿐이다. 그 선을 잘라서 앞 뒤로 다시 선택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지우고 다시 그을 수도 없다. 오직 단 하나의 선을 계속, 쉼 없이 그려서 나갈 뿐이다. 장기판의 卒은 가재걸음이라도 하지 삶의 궤적은 중단 없고 후퇴 없는 전진뿐이다. 쓰러지면 안 되는 두 바퀴 자전거처럼. 그러니 그 선을 간섭하는 幸이나 不幸을 비껴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몸으로 떠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 접하다 보면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체념하게 될 인간이 이상하지만은 않다. 체념하는 인간이 좌절하게 되거나 아니면 반항하는 인간으로 자신의 살아 있음을 표현하려고 하겠지만 부조리한 삶이 조리있게 변하지는 않는다. 그 人間型에 'Sisyphus'가 있다.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고 그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릴 때 그 돌멩이가 정상에 세워지고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희망)다면 그 고통은 잊을 수 있는 고통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믿음이 헛된 바램이란 것을 알고 있다. 대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자각을 한다. 카뮈(Camus)의 주장대로라면 그 운명의 자각은 '승리'로 표현된다.

Camus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세상에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질서도 구원도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存在란 부조리한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는 형이상학적인 환상을 품는 대신 부조리의 인식을 철저히 지녀 나가면서 죽음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때까지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 나가야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1913년 Algerie에서 태어난 이듬해에 부친을 잃고 음울한 유년기를 보내고 결핵에 걸려 더 비참한 학창시절을 보낸 기억에 起因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삶의 궤적이 하나의 선-그는 사막으로 표현했다-이라면 그 선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줄 위에서 버티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만화처럼 항상 있는 것이 아닌 희망에 의지해서 사는 삶에 '희망은 없으니 포기하고 살아라!'며 직설적인 화법으로 충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태도가 부조리한 세계를 사는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것들이 다 나온 뒤 멍청한 '희망'이라는 녀석만 나오지 못했다. 세상에 나온 온갖 것들, 즉 불행이니 슬픔이니 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나와서 인생에 관여한다면 나오지 못한 희망이 무슨 관여를 한다는 것일까? 이것은 신화의 오류이다. 못 나온 희망은 그저 그런 단어로만 남아 있다고 보는 게 편하다.
그러니 카뮈의 승리 인식처럼 매 순간 철저히 최선의 선택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마라톤이야 결승점을 알고 있으니 매 단계마다 스피드를 조절해서 뜀박질의 緩急을 줄 수 있지만 인생이 어디 그런가? 출발 銃聲은 들었는데 어디서 '끝!'이라고 테이프를 걸어 놓을지 모르니 그저 죽어라고 뛸 수밖에.(끝)



2002. 10/10
문득 아침에 쓰다.

주 모씨

by 쥬피터 | 2005/05/31 23:36 | 중얼중얼 잡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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