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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점프] 만화보다 더한 현실

만화보다 더한 현실
-중앙역의 국화꽃들 옆에서-




지난 주말에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탄 택시의 아저씨나 아파트의 이웃들 중에도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와 연계되지 않은 분이 없더군요. 어떤 분은 외가의 조카딸이 희생자가 됐고, 어떤 이는 방화범의 동네에 살고 있고, 또 한 아이는 같은 반 친구가 현장 근처에서 실종됐다고 합니다.
현장의 시커먼 그을음은 아직도 여전한데 그에 대비되는 흰 국화 무더기는 보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그림1) TV 화면에서 보는 것과 다른 생경함과 참혹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누른 뒤 이 사건이 너무나 '만화적'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만화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는 당혹감 때문이었습니다.



[현실과 만화의 교집합]

하나-언제나 갑작스러운 고통

사고(事故)는 그 말속에 '뜻 밖에' 일어 난 좋지 않은 일을 말합니다. 미리 알았다면 사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고는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만화 [나나세](Yasutaka Tsutsui 작/Sayaka Yamazaki 그림)에서는 기차를 타고 가는 여 주인공이 산사태로 사고가 날 것을 미리 보게 됩니다.(그림2) 예지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거든요. 그러나 대개의 현실에서는 초능력자가 그 내용을 말하더라도 예언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미친 소리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입니다. 물론 가까운 미래, 즉 한 시간 뒤의 교통사고를 예견한다면 맘이야 찜찜하겠지만 1년 뒤를 예견한다면 선무당 취급을 받는 것이 보통입니다. 만화에서도 나나세는 이런 이유 때문에 망설이며 결국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현실에서 나나세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현실의 재앙은 인간의 예지가 불가능한 저 너머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소리 없이, 순식간에 다가옵니다. 준비되지 않은 고통인 셈이지요.

둘-닫힌 공간인 터널 혹은 동굴

이번 참사는 지하 터널에서 발생했습니다. 물론 평상시에는 밝은 조명 아래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공간이며 외부와 통신이든 호흡이든 연결이 되어 단절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드레곤 헤드]와 [생존게임], [야후] 등은 이야기의 시작을 기차 터널과 동굴, 붕괴된 지하로 합니다. 이 설정은 고립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립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고 어느 경계를 기준으로 안에, 혹은 밖에 있다는 차이를 확실히 합니다. 이러한 고립은 고층 건물의 옥상이나 외딴 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조차 볼 수 없는 지하 터널은 다른 곳보다 더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림3-1,2) 사방의 고립이 아니라 상하의 고립까지 제공하는 곳은 터널이며 동굴, 혹은 매몰된 지하이기도 합니다.

셋-알 수 없음의 기호, 어둠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대상은 빛을 매개로 해서 눈에 반사되고 그 신호를 뇌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한 눈에 보이는 별들이 사실은 제각각의 시간으로 현재에 비추어 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둠은 아무런 것도 보이지 않게 합니다. 터널은 그 벽 자체로 외부와의 시선 연결을 차단하고 내부에 어둠을 지녀 더욱 더 무엇인가를 못 보게 합니다. [드레곤 헤드]나 [야후]는 어둠의 이미지를 적절히 사용한 작품입니다.(그림4-1,2) 그래서 어떤 페이지는 전체가 먹칠로만 되어 있는 경우도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어둠을 밝힌 뒤 드러난 기차의 모습은 어느 것이 만화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 지 구분조차 어려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대개의 사고가 그렇듯이 어둠을 증폭시키는 연기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그림5-1,2) 고립된 터널 안의 어둠과 연기는 모두 알 수 없음의 기호이며 요소입니다.

넷-무지(無知)의 공포

이러한 어둠과 고립은 '알 수 없음'으로 배가되어 공포를 증폭시킵니다. 거기에 더해서 예견은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인지 알기만 해도 줄어 들 공포가 대개의 경우 무지의 상태에서 더해집니다. 무지의 공포는 모든 공포의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과 어두운 골목길에서 급작스런 마주친다거나 공포 장르가 도입부에 비밀과 복선의 암시가 지뢰밭처럼 일관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몸에 상처가 생겼을 때 꼭 확인을 해 봐야 하는 습성의 바닥에는 알 수 없음을 '알고 있음'으로 바꾸려는 의식의 결과입니다. [드레곤 헤드]를 비롯한 재난 만화의 한 줄기는 이야기의 종반까지 재난의 원인을 드러내지 않습니다.(그림6) 물론 [그의 나라]처럼 특이하게도 원인이 도입부에 설명된 재난 만화도 있습니다.(그림7) 대부분의 재난 만화는 전쟁이나 지진, 혹은 단순 사고인지 당사자들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요즘의 현실에서는 대부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되면 사고의 전말을 알게 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 희생자의 입장입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더 슬프게 합니다. 어느 죽음인들 슬프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러한 경우는 말 그대로 여한(餘恨)이 너무 많아서 더욱 아프게 합니다.

다섯-아름다워서 슬픈 사람들

엄청난 재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경우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사실 이분법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천성적으로 사람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선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녹음된 전화 내용들은 많은 사람의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남아 있는 분들의 아픔은 지금부터 가슴에 저며두고 살아야 할 아픔일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하는 이를 두고 먼저 가신 분들의 마지막 바람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왜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 사과의 말이며 감사의 말이며 후회의 말들이었는지. 누구도 원망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님께 '미안해요'라고, 남편에게 '고마웠어요', 친구에게 잘 대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지.
또한 엄청난 사건의 이면에는 늘 드라마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극심합니다. 사고 몇 일전 방화범을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던 담당의사의 아내가 희생된 억울함, 사망자로 분류된 아들의 발을 보고 살려낸 어머니의 기적 같은 모성애가 그렇습니다.

여섯-살아 있는 부끄러움

엄청난 재난의 사선(死線), 그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거나 살아 난 사람들 중에 천성적으로 인간이 선하다는 생각을 부정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참사에는 그 부분이 너무나 극단적이었습니다. 사고의 과정과 수습에서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을 두 번, 세 번 더 참혹하게 하는 행동이 드러납니다. 혼자 살겠다고 남을 뿌리치며 도망가는 것도 마음에 걸릴텐데 문까지 잠그고 간 사람에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사망이 확인 된 유족을 부러워하는 기가 막히는 상황에 처한 실종자 가족이 있는데 쓰레기로 시신이 버려진 경우에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그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 징계를 면하고자 녹취록을 편집하는 그 모습들은 뭐라고 표현할 단어도 못 찾겠습니다.
비록 만화라는 매체는 그 성격이 과장과 왜곡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강화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야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슬프고 아픈 일입니다. 재앙에 반응하는 인간 행위의 광기(狂氣)(그림8)가 치밀할 수도 있는 것일까요. 재난 만화에 등장하는 선악의 단순 캐릭터가 너무 도식적이라고 보았는데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현실의 참담함

만화에는 설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용을 더 면밀하게 하고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주변 환경을 꾸며냅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만화에서도 이번 참사처럼 막다른 곳으로 완벽하게 참사를 진행(?)시킨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황당한 일을 말할 때 '만화 같다'고 합니다. 만화라는 것이 인간의 상상력을 가장 잘 담아 낼 수 있는 그릇이고 그 상상력이야 끝간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화보다 더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으로 남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번 사고를 만화로 그렸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평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이거 너무 억지야. 사고를 크게 해서 주인공을 더 멋있게 하려고 얘기를 너무 꾸민 거잖아?'라고 말입니다.

예정된 해피엔딩이라면

대중문화 작품에서의 재난은 '해피 엔딩(happy ending)'을 예견하고 있습니다.(그림9) 그것이 주인공에 한정한 경우이고 만화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죽지 않을 거야, 혹은 사고 자체가 주인공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재난이 현실에서도 예견된 결말을 수반하거나 삶의 한 과정이라면 우리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공포에 짖눌려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재난이 에피소드가 아니라 결론이거나 이겨낸 뒤에도 고통스런 후유증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만화를 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냉혹하거나 예견된 결말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만화로 만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도 하고 고통 뒤에 적절한 의미가 올 것이라고 믿게도 합니다. 만화는 또한 우리에게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사랑하는 이에게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게 합니다.(그림10) 그러나 무엇보다도 만화는 현실이 약속하지 못하는 미래를 행복한 결과로 보여 줍니다. 끝까지 억울한 사람이 만화에는 없거든요.
그러나 꿈과 희망을 주는 만화라는 표현이 지금처럼 무참하게 느껴지는 날이 다시없기를, 그래서 억울한 죽음이 마지막 페이지가 아닌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실은 '다음 권'으로가 없거든요.

무고한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끝)

2003. 3. 5.
영점프 7호

by 쥬피터 | 2005/05/31 18:45 | 칼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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